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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Dec 28. 2015

P.s.




꽃이 말라갑니다. 그 밤은 느닷없기 그지없었는데 말입니다. 마른 잎들의 마찰음이 성기어 보입니다. 꽃이 말라 있는 모습이 눈물이 나도록 예쁩니다.

대설이 지났고, 오늘이 동지였지요. 이로써 올해 절기는 더 이상 허락 되지를 않는군요. 겨울바람은 아직도 따뜻하기만 하고, 그에 따른 탄식만이 발 언저리에 입니다. 절기마다 추신을 넣었는데 벌써 새해의 문턱이네요. 곧 날은 무섭도록 얼어붙을 것이고, 두 번의 추위를 견뎌야만 봄을 맞을 수 있겠지요.

하얀 원피스 하얀 운동화, 그리고 개중 제일 하얀 편지지를 꺼냅니다. 다가올 계절을 신경 쓰는 모습이 영 어색하다고요. 아뇨. 들키지 않았을 뿐 언제나 고대했습니다. 아마 앞이빨 한 짝에도 그 기대는 세어 들어가 있을 겁니다. 세상에, 앞이빨까지 기대가 차오른 것은 살다 살다 처음 겪어본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흔들리는 이빨을 빼야 하는지 입을 앙다물고 보내지 말아야 하는지가 참으로 어렵더란 말입니다. 빼어도 두어도 아픈, 그러나 살아지는 것이더랍니다. 다음 계절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 계절에, 무엇보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하얀 편지지를 꺼내 들었지요. 오로지 당신을 적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은 한 글자도 적지를 못했습니다. 계절이 바래 지는 와중에도 이 종이만은 새 것처럼 간직했습니다. 과하다는 생각 왜 아니 들겠습니까만은, 종이의 빳빳한 정도가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구겨보고 애원해 보아도 종이는 하얀 젊음만을 뽐낼 뿐입니다. 가을 접어들고 낙엽 으스라지면 종이도 땅으로 떨구어질는지요. 그전까진 아무래도 가방 안을 바스락거리며 추신만을 잔뜩 달겠지요. 전하기도 뭣한 무미의 문장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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