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ne Aug 22. 2019

평양 소년의 서울 살이

2012년 제6회 서울사랑 공모전 우수상 수상

온통 찜질방 같던 한반도의 무더위는 슬며시 사라지고 어느새 가을인가 싶더니 벌써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일곱 번째로 맞는 서울의 10월이다. 7년 전 이맘 때 나는 두만강의 차디찬 어둠속에 30여 년간의 내 삶의 추억을 갈무리하고 내 고향을 등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곳 서울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있다. 평양교외에서 시작되었던 나의 생은 서울에로 이어졌다. 


평양에서 서울은 직선거리로 200km밖에 되지 않는다. 차로 불과 4시간이면 당도할 서울까지 내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1년3개월, 걸어와도 100번은 더 왔을 인고의 시간이다. 사람다운 삶, 북보다 나은 삶을 위해 남쪽을 향했던 나의 남행길은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던 시련의 길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북쪽에 남겨두고 만남의 기약은 물론 내 자신의 생명조차 담보할 수 없는 고뇌와 번민 속에 어렵게 결심을 내렸다.


그때는 통일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이산의 슬픔이 지금처럼 뼛속까지 절절하지 않았다. 머지않은 앞날에 통일도 되고 남한에서 열심히 살아 자랑스러운 아들로 어머님 품에 안기게 되리라는 확신이 더 컸다. 하염없이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뒤로 하고 중국에서 11개월, 동남아에서 4개월여의 시간을 거쳐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평범한 공무원가정에서 태어나 상위권 성적으로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김정일 경호부대에 입대해 노동당에 입당하고 군관도 되면서 북한에서 동년배의 남자들이 걸을 수 있었던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걷던 나를 남행길로 떠민 것은 미래와 희망이 없는 그 땅에 대한 회의와 절망이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나는 지금 서울에서 내 인생의 2막을 쓰고 있다.




3개월의 사회적응교육을 마치고 첫 걸음을 내디딘 서울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길거리도 사람도 낯설었고 대중교통과 편의시설 등 생활환경적응은 물론이고 진로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거기다 뜻하지 않게 임대주택마저 잃고 길거리에 나 앉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 몸까지 아팠다.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넋 나간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걷곤 하던 그 시절의 밤거리는 너무도 차가웠다. 새 삶을 찾아 먼 길을 돌고 돌아 찾아 왔지만 찬바람 날리는 겨울의 서울 거리에서 운명의 희롱 앞에 어깨가 처지고 한없이 작아진 한 남자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와 아픔에 다시 한 번 절망하고 있었다. 그때는 잠깐이지만 정말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만한 일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랴!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그 당시의 상황에선 냉정하고 허무하게 들리지만 맞는 말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내 인생도 소중했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니 좌절과 실의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때 다정한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들과 정착도우미분들이었다. 


어느 날 앓고 있는 내 소식을 전해 듣고 복지관 부장님과 사회복지사 한 분이 월세방에서 혼자 떨고 있던 나를 찾았다. 반찬과 생활용품을 들고 찾아 온 그분들은 밥상까지 차려주시며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분들의 정성을 생각해서 힘겹게 밥술을 뜨는 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사회복지관분들의 소개로 나는 어느 한 병원에 입원하였고 점차 건강을 회복해 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나를 위해 바쁜 속에서도 면회를 오셔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힘을 주셨던 사회복지사님들...

그 분들의 그런 정성과 관심이 나를 다시 일으켜준 사랑의 힘이었다. 동남아에서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도 내 소식을 듣고 위로와 격려의 전화를 해왔다. 먼 곳에서부터 시간을 병상의 나를 찾아 준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관심과 사랑이 내 건강을 회복시켜주었고 다시 초심을 불태울 수 있게 해주었다. 퇴원 후 낮이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이면 종합사회복지관의 컴퓨터강의과정에 참가했다. 취직을 위해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다 헛물을 켠 후 기술과 지식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나는 노동부 취업과정에 신청하고 서울의 한 전산세무회계학원을 다녔다.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취득한 나는 배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띠동갑 되는 연배의 학생들과 나란히 마주 앉아 그리도 원했던 공부를 하는 기쁨은 한량없었다. 배움에 나이가 무슨 걸림돌이랴!


처음에는 내가 탈북자란 사실을 알고 말도 잘 하지 않고 슬금슬금 피하던 같은 반 학생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내게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어려운 전문용어며 영어, 파워포인트나 리포트 쓰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같은 반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교수님들도 관심을 갖고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런 도움과 성원 속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 후 15년 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이고 남북한의 이질감 때문에 어려운 점이 더 많았지만 열심히 공부해 학점 3.75로 졸업할 수 있었다. 만족할만한 성적은 아니지만 내 노력의 결과물이어서 졸업증을 받아들고 속으로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교수님과 어린 학우들의 도움도 받고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가며 공부해 받은 졸업학점이고 졸업증이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 후 바로 한 사단법인의 기획 및 회계담당으로 취직한 나는 서울에서 취직한 두 번째 직장에서 정말 밤을 새워가며 일하고 주말까지 반납했다. 이 사회에서 내 꿈을 이루는 길은 열심히 살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영어학원에 다니고 통일교육 강사로도 활동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나 자신에게 당당하고 자부심과 희열이 넘쳤다.


이런 나에게 서울시민의 보금자리 해결사인 SH공사의 임대주택제공은 그야말로 천군만마였다. 몇 평짜리 옥탑방에서 여름더위에 모대기고 겨울추위에 떨어야 했던 나였다. 보금자리의 소중함을 절감한 나에게 14평형의 임대주택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닌 이 사회의 사랑과 격려가 담긴 희망의 요람이다. 임대주택에 당첨되었을 때도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는 너무 고맙고 또 행복해서 흘린 기쁨의 눈물이었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법인가보다. 그러던 2010년 한 지자체에서 북한이탈주민 계약직공무원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담업무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관련업무였다. 남한행을 결심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통일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싶었던 내 꿈에 근접하는 희소식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응시원서를 써내고 면접까지 본 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채용담당자에게서 “축하합니다. 합격 되셨습니다”라는 전화를 받는 순간의 그 기쁨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 7월, 지자체 지방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된 나는 북한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남한의 지방행정업무를 배우면서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업무와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업무를 맡게 되었다. 행정업무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과장님과 계장님, 선배 공무원분들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주셨다. 행정서류 작성법에서부터 민원인응대방법과 예산관련업무에 이르기까지 친형, 친누나의 심정으로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그 분들 도움으로 나는 짧은 기간동안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불과 몇년 전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던 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너무도 아프고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내는 쓰지만 노력의 열매는 달다. 아직은 미완의 결실이지만 한걸음, 한걸음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또 뛰고 있다. 돌이켜보면 서울을 떠나서 오늘 날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서울은 나에게 보금자리를 주었고 꿈과 희망, 새 삶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이 항상 내 곁에서 나에게 관심을 돌려주고 믿음을 주고 손잡아 이끌어 주었다.


내 인생 2막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서울,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내 발이 되어준 서울메트로며 서울 버스, 내 열정과 땀이 스민 서대문구의 대학교정과 종로구의 연구원, 지금 편입해 다니고 있는 서울사이버대학교...

서울의 구석구석에 내 삶이 묻어 있고 나의 꿈과 열정도 서울에서 꽃피고 있다. 고마운 분들이 함께 나와 천만 서울시민으로 살아가고 계신다.


내가 걸었던 서울의 거리거리와 서울의 하늘, 한강과 관악산, 세계인을 경탄케 하는 서울의 약동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한다. 앞으로 더 살기 좋고 더 변모할 서울의 미래를 확신하며 평양소년은 서울과 사랑에 빠졌다. 경쟁이 치열하고 글로벌 경제위기속에서 각박한 삶이 늘고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노라면 언젠가는 보답의 열매를 안겨주는 기회의 땅, 서울이 나는 좋다. 따뜻한 마음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부대껴가는 사람냄새 나고 정이 많은 서울이 나는 좋다.     



더 따뜻한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서울이 맨 앞장서 있다.   대한민국의 심장, 한반도의 중심 서울이 이제는 DMZ너머 저 북녘주민들에게도 희망의 등대가 되고 있다. 한류열풍을 타고 북녘까지 흘러 들어간 남한의 드라마, 영화, 가요를 보고 들으면서 희망을 찾고 고달픈 심신을 달랜다. 그래서 이제는 북녘주민들도 서울에서 통일의 희망을 보고, 번영하는 통일한국의 미래를 꿈꾼다. 이제 서울은 한민족 전체의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희망의 서울을 위해, 서울을 보며 희망을 꿈꾸는 북녘의 부모형제와 북녘동포들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히 살아야겠다. 그래서 통일의 그날, 그 희망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 삶의 궤적으로 웅변해야겠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아야 겠다.     




서울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제 날 평양소년이 오늘은 서울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따뜻한 마음과 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이제 내 가족이고 이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역동적이고 밝을 서울에 내가 산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들로 인해 희망이, 여기 서울에 살아 숨 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