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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Aug 23. 2019

南과 北의 돼지 ‘사랑’

-황금돼지해의 단상-

올해는 황금돼지해이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돼지에 재물인 황금이 붙은 해여서 올해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재물과 길운이 따른다는 속설 때문에 출생아수가 늘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기도 했다. 실제로 돼지는 많은 새끼를 낳는다. 또 돼지의 한자 발음인 ‘돈’이 돈과 같아서 재물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돼지꿈을 꾸면 사람들은 로또복권을 사기도 한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은 잘 산다는 속설도 있다. 


2019년 황금돼지해


이처럼 여러 가지 좋은 의미로 상징되는 돼지는 인간과 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동반자였다. 한반도에는 2000년 전에 재래돼지가 들어왔다고 한다. 돼지는 더럽고 지능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의외로 깨끗하고, 지능도 높은 편에 속한다. 돼지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새끼동물 BEST 20’에 당당히 오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돼지는 인류가 식용으로 가장 좋아하는 동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민족의 돼지 사랑은 유별난 것 같다. 한민족은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민족의 하나이다. 한국인의 돼지고기 소비량은 2018년 기준 25.2kg으로 OECD 국가 평균보다 많은 양을 소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의 한 해 돼지고기 소비량 약 895,900톤 중에서 삼겹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50%로, 삼겹살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큰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소울 푸드다. 




탈북민인 내가 삼겹살을 처음 접하고 먹어 본 것은 2006년이다. 그해 1월 나는 인천공항을 통해 대한민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친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하나원에서 퇴소 후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을 도와주셨던 대한적십자사 소속 자원봉사자 분들과 함께 갔던 곳이 바로 삼겹살집이었다. ‘삼겹살’이라는 낱말을 그때 처음 알았다. 또 불판에 지글지글 구워서 마늘과 쌈장과 함께 상추나 깻잎에 싸먹는 돼지고기 삼겹살이 그렇게 환상적인 맛인 줄도 처음 알게 됐다. 소금을 둔 참기름에 찍어먹는 삼겹살 구이도 정말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같은 하늘아래, 같은 돼지고기인데 맛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삼겹살과 깻잎의 '궁합'은 OK!


그 이후 내게 ‘고기’하면 그것은 곧 ‘삼겹살’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이 땅에 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사회정착을 위해 노력하던 나에게 삼겹살구이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주는 또 다른 친구였고, 별식이었다.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지자체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나는 삼겹살집을 자주 찾았다. 삼겹살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았고 늘 새로운 맛이었다. 늘 먹는 밥 말고 고기생각이 나면 지갑 걱정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역시 삼겹살 구이였다. 또 직장동료들,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술 한 잔 기울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삼겹살집이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이다. 명절날에 돼지고기 국이나 돼지고기 구이를 먹어야 제대로 명절을 보냈다고 할 정도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돼지고기를 선호한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에서는 중산층 정도가 돼야 그나마 돼지고기를 자주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돼지는 잡식성이고 비교적 빨리 자라는 편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농촌마을은 물론이고 도시 가구들에서도 돼지를 기른다. 아파트 부엌마루 밑에 돼지를 키우는 세대들도 꽤 많았다. 특히 1990년대 경제난과 식량난을 겪으면서 돼지를 키우는 집이 많아졌다. 돼지고기 1kg이면 옥수수 10kg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 마련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농촌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일반 주민 가정에서 돼지를 많이 키웠다. 거기다 농촌에서는 ‘인민군대 지원’ 명목으로 해마다 돼지고기 50kg씩 의무적으로 국가에 바쳐야 했다.



내가 어릴 때 농촌마을에 살던 우리 집에서도 돼지를 키웠다. 돼지 먹이는 집에서 나오는 쌀뜨물과 잔반, 그리고 산과 들에서 돼지풀을 뜯어다 끓여 주었다. 혹시 돼지를 키우지 않는 이웃이 있으면 뜨물을 얻어다 먹이기도 했는데 90년대 들어서는 집집마다 대부분 돼지를 키워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와 동생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들에서 쇠비름 같은 돼지풀을 뜯어다 사료에 보탰다. 어떤 집에서는 돼지에게 인분을 끓여 먹이기도 한다고 했는데 우리 집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돼지를 여러 달 키우면 60~80kg 정도로 자란다. 그러면 돼지를 잡아서 내장 같은 부산물은 집에서 처분하고, 가죽과 살코기는 모두 인민군대 지원물자로 보내야 했다. 여러 달 키우다보면 정이 들어서 살아보겠다고 비명을 지르며 우리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돼지를 보는 것은 정말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여동생들은 돼지가 불쌍하다며 울먹이곤 했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은 돼지를 도축할 때에는 집안에 들어가 그 광경을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돼지가 불쌍한 것과는 별개로 우리 집도 그렇고 이웃에서 돼지를 잡으면 그날은 명절이었다. 1년에 한 번 삶은 돼지 내장과 순대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대를 만들 때 돼지 피가 꼭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돼지를 잡을 때는 돼지 목 밑에 양동이를 놓고 피를 받았다. 돼지를 잡은 날이면 부모님은 돼지 머리와 내장은 삶아내셨다. 또 소금으로 여러 번 깨끗이 씻어낸 돼지 소장과 대장에 피와 찹쌀 조금, 흰쌀과 배추를 넣고 순대를 만드셨다. 돼지 피가 남으면 돼지 피밥을 만드셨다. 


찹쌀과 흰쌀, 돼지피와 내장이 들어가는 '북한식 순대'


나와 동생들은 부엌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에 군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가 익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다 익으면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에게 심부름을 시켜 동네 어른들과 이웃집 아버지들을 모셔왔다.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는 그릇에 담아 이웃집들에 조금씩 맛이라도 볼 수 있게 돌리곤 했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과, 이웃집 아버지들은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를 안주 삼아 술상을 벌이셨다. 어머니와 음식 마련을 도운 옆집 아줌마, 그리고 우리 4남매는 다른 상에서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를 맛있게 먹곤 했다. 부모님의 음식솜씨가 좋으셔서 우리 집에서 돼지를 잡는 날이면 손님이 많았다. 음식이 맛있는 것은 좋았지만 손님이 많은 것은 우리 4남매에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이 작아지니 말이다. 힘들게 키운 돼지를 해마다 50kg씩 인민군대 지원 명목으로 국가에 무상으로 바쳐야 하는 일이 그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아쉬움은 있었어도 큰 불만을 가지지는 못했었다. 정작 우리는 알짜 고기는 먹어보지 못하고 부산물이나 다름없는 내장과 돼지머리 정도에 만족하고 행복해 했어야 했다.


북한에서는 일반 주민들에게 김일성, 김정일 생일과 양력설, 공화국 창건 기념일, 당창건 기념일 등 5대 명절에 세대 당 돼지고기 1kg 정도를 공급한다. 그 고기로 일반 주민들은 명절날 아침 돼지고기 국을 끓여 온 가족이 먹는다. 그 외 고등중학생들이 봄과 가을에 1~2달씩 농촌지원을 나가는데 한 두 번 고생한다고 해당 농장에서 돼지를 잡아 돼지고기국을 먹는다. 물론 농장 간부들과 학교 교사들은 돼지고기를 한 몫씩 크게 챙긴다. 그렇게 북한에서 일반 주민들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돼지고기국밥을 파는 식당도 있었지만 자주 사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배급이 중단되자 북한 주민들은 장사에 나섰고, 이때부터 장마당에서 돼지고기 파는 매점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돼지고기 1kg 살 돈이면 식량을 몇kg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자주 사먹을 수 있는 여력이 되는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1990년대 초반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했는데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군대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돼지고기는 5대 명절과 군 창설일인 4.25 명절까지 6번 정도 아침에 삶은 돼지고기 몇 점 들어간 고깃국이 전부였다. 중대에서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도 하는데 워낙 비리가 심해 병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중대장과 중대정치지도원을 비롯한 간부들이 몇kg씩 가져가고, 사관장, 부소대장, 사관들이 한 덩어리씩 먼저 먹고 나면 병사들에게는 “돼지가 장화신고 건너간 물을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90년대 북한군에서 명절에 공급되는 돼지고기는 화학비료를 먹여서 키웠다고 해서 일명 ‘화학돼지’라고 불리는 지방층 많은 돼지였다. ‘화학돼지’는 식물성 사료와 가정집 부산물, 풀을 먹여 키운 돼지와 고기맛과 질이 확연히 달랐다. 살코기는 별로 없고 비게만 많은데다 비게도 이상하게 맛이 없고, 느끼한데다 그릇도 잘 가셔지지 않았다. 또 평소에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별로 먹지 못하다가 명절날 어쩌다 기름기가 너무 많은 ‘화학돼지’ 고기국을 먹은 병사들은 배탈이 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명절날과 그 다음날이면 화장실이 급해 달려가는 병사들이 많았고, 화장실 앞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다 군복에 실수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다. 


북한군 돼지목장에서 키우는 돼지


그런가하면 부대 주둔지역 협동농장과 가정집 돼지축사에 몰래 들어가 돼지를 훔쳐내다 팔아 제대준비를 하거나 아는 주민 집에 가져다 주고 장마당에 내다 팔아서 돈을 챙기는 사관과 병사들도 있었다. 돼지 뿐 아니라 닭, 토끼, 염소 등 닥치는 대로 군인들이 훔치다보니 군부대가 있는 주변 마을에서는 집짐승 키우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었다. 매일같이 군부대에는 민간인들의 민원이 들어왔다. 그러나 관련 수사는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워낙 빈번한 절도 범죄가 횡행하고, 어떤 가축 절도에는 군관들이 개입돼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7년간의 병사생활 끝에 장교로 임관했다. 그때는 국제사회의 지원과 자생적 시장 확산으로 식량난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됐을 때였다. 여단 지휘부에서 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휘부에는 미혼이어서 독신자침실에서 생활하는 젊은 참모들이 몇 있었다. 퇴근 후에는 무료한데다 즐길 취미생활이 별로 없다보니 미혼 참모들끼리 카드놀이를 하곤 했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를 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월급을 받으면 15km 정도 떨어진 읍 장마당에서 돼지고기를 사와 삶아먹는 내기가 돼 버렸다. 


당시 참모급 한 달 월급으로는 돼지고기를 3kg 정도밖에 살 수 없었다. 결국 카드내기에서 지면 한 달 월급을 다 날려야 했다. 카드놀이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거의 매번 지곤 해서 월급을 타는 날이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읍 장마당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올 수밖에 없었다. 돼지고기를 사오면 지휘부 건물에서 전기온열기를 켜고 냄비에 돼지고기와 두부를 같이 삶아 만든 돼지두부전골을 술안주로 먹곤 했다. 아니면 결혼생활을 하는 친한 군관 집에 가서 삶아 술안주로 삼기도 했다. 


전역 후 나는 한국행을 결단했고 중국과 미얀마, 태국을 거쳐 한국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제2막을 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이 땅에서 대학교에도 다니고,  지자체와 회사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몇 년 전 가정을 이룬 사람도 나와 같은 탈북민이다. 아내는 나보다 더 삼겹살을 좋아한다. 연애할 때 만나서 같이 밥을 먹으면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삼겹살집에서 데이트를 했다. 삼겹살을 먹은 날이면 삼겹살 구이 냄새가 배여 영화관에는 갈 수가 없었다. 결혼 후에도 우리 부부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삼겹살집에 가서 삼겹살구이를 먹곤 했다. 나는 목살을 더 좋아해서 목살을 먹고, 아내는 꼭 삼겹살을 먹었다. 아내는 오겹살도 좋아하고 제주흑돼지도 좋아한다. 그래서 3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는 제주흑돼지를 파는 곳에 몇 번이나 갔었다. 


제주 흑돼지


가끔 아내는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북한에서 계속 살았으면 삼겹살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것 아니야? 우린 정말 복 받은 거야.” 삼겹살 구이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라니...

한우도 좋아하지만, 한우보다는 삼겹살이 언제 먹어도 맛있고, 더 고소하고, 질리지 않는다는 아내... 


이런 아내와 나에게 올해 축복의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임신 소식이 없어 불안과 초조감이 컸던 우리 부부였다. 좀 늦은 나이에 결혼하다보니 더했다. 산부인과와 병원에 가보니 둘 다 문제는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웬일인지 자연임신이 되지 않아 걱정이 많았고, 드디어는 시험관 시술까지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지난달 아내는 여러 가지 이상증상 때문에 임신테스트를 해보고, 산부인과에 갔다. 거기서 임신 7주차라는 진단을 받았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던지. 나와 아내는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나선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 입덧을 하면서 아내는 그렇게 좋아하던 삼겹살을 먹지 못하고 있다. 입덧이 끝나면 아내에게 삼겹살을 많이 사줘야겠다. 


우리 아이의 출산예정월은 내년 3월이다. 황금돼지해라는 올해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아주 잠깐 들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우리에게 2세가 찾아와 준 것만 해도 더 없는 축복이고 선물인 것을... 태어나는 시기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소중한 우리 두 사람의 아기가 건강하게, 또 아내가 순산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요즘이다. 그리고 우리 아가, 건강하게 태어나고, 무럭무럭 자라서 아빠, 엄마랑 손잡고 엄마가 좋아하는 삼겹살집에도 가고, 좋은 곳 여행도 하면서 이 땅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꾸나. 이런 행복과 일상을 저 멀리 북녘에 계신 너의 할머니, 삼촌, 고모네 가족이랑 함께 누릴 그날을 위해서 아빠는 앞으로 더 열심히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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