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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Aug 22. 2019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산

2016년 제16회 산림문화작품 

나는 오늘도 아내와 함께 관악산에 오른다. 산속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등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빈틈없다. 풀잎엔 아직도 아침이슬이 맺혀 촉촉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밝다. 이젠 익숙해진 것인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 꽁지를 달싹이며 산새들이 갸웃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가끔 다람쥐며 청솔모가 길을 홱 가로질러 달려간다. 동화를 연상케 하는 숲속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기운과 솔향이 마음을 기분 좋게 어루만진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하는 산행이 일과가 됐다. 산에 오르면 평일에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고 마음도 치유된다. 건강은 덤이다. 우리 부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산길을 오르내린다. 산행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행복과 즐거움이 묻어난다. 산중턱에서 보이는 서울과 과천의 광경도 장관이다. 이 강산 곳곳마다 솟아있는 산이 주는 선물이다. 


산은 다 같은 산인데 왜 이렇게 다른 모습, 다른 느낌일까? 저 하늘 멀리 유유자적하게 제 갈 길을 가는 더미구름을 바라보며 어느새 상념에 젖는다. 내 고향은 북한 함경북도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북중 국경지역의 고향 뒷산에는 당시만 해도 수림이 빽빽했다. 밤이면 들려오던 늑대울음소리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가끔씩 산속으로 들어가셔서 소발구로 땔나무를 한가득 싣고 오곤 하셨다. 늦가을이면 할아버지가 따온 머루에서 방안 가득 감미롭게 퍼지던 머루향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해 우리 가족은 서해안의 한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새로 이사를 간 곳에는 00산이 있었다. 서해안 평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 산에는 고조선시대의 역사 유적인 고인돌떼가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인돌떼를 직접 볼 수 있어 정말 신기했다. 00산은 그 지역 학교들의 등산지였다. 봄과 가을이면 학생들은 그 산에 원족을 가 평평한 공터에서 체육경기와 장끼자랑, 보물찾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1990년대 초, 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북한군에 입대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가 접해있는 중부 산악지대였다. 신설부대다보니 병영 등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군사훈련보다는 산에 가서 건설자재로 쓸 나무를 찍어내고, 땔감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부대 주변 산은 갈수록 푸른 빛깔을 잃어갔다. 거기다 식량난이 닥치면서 화전을 일구려는 주둔 지역 주민들과 군인들이 일부러 산불을 놓아 많은 면적의 산림을 태웠다. 생존이 다급했던 사람들에게 산림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 몇 그루보다는 한 줌 옥수수와 콩을 얻을 수 있는 화전 한 뙈기가 더 중요했다. 


그 시절, 사람들 뿐 아니라 산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7년간 병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찍어내고 불태운 수십 년 수령의 소나무만 해도 수백그루는 될 것이다. 1차원적인 생존 욕구 앞에서 산림보호, 환경보호라는 2차원적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다. 


군 복무시절 내게 산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훈련과 제재목, 땔나무 때문에 올라갈 때는 원한의 산이었다. 추운 겨울 아침 일찍 기상해 조기작업이라고 하면서 땔나무와 제재목 때문에 산에 가야 할 때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나마 봄, 가을에 산나물과 산열매 따러 갈 때에는 허기진 창자를 채울 수 있어 힘이 났다. 하지만 야맹증과 영양실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병사들이 채취해 온 산나물 가운데 고급나물로 분류되는 참나물과 두릅은 군 간부들의 차지였다. “막나물”로 불리는 곰취나 이름 없는 산나물들은 병사들의 몫이었다. 


산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어느 가을날 대대 간부에게 줄 다래를 따러 산에 올라갔었다. 부대 주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짝 벼랑 위에서 참나무를 타고 20m는 족히 위로 뻗어 올라간 다래넝쿨을 발견하고 도끼로 참나무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3분의 1쯤 찍어냈을 때 참나무가 육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아래로 기울면서 “쩌어억~” 소리를 내며 쪼개져나갔다. 어쩔 새 없이 아름드리 참나무의 밑 둥이 바람을 휘가르며 내 얼굴에서 불과 한 뼘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위로 들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뼘을 사이로 생사가 갈린 순간이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데다 다리맥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산과 나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군복무 7년 만에 처음 집에 간 날, 나는 뒷산을 보고 경악했다. 내가 알고, 학창시절 소중한 추억이 깃든 울창한 00산은 오간 데 없고 나무 한그루 없이 왜소하고 황토만 드러난 민둥산이 떡하니 있었다. 하기는 그 시절, 그 땅에서 수난을 겪지 않은 산이 있었을까? 탈북하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본 북한 산야의 모습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하늘아래 저 북녘 땅, 산들과 수목의 고난은 현재진행형이다. 


산은 태고 적부터 있던 그 산 그대로인데 세상이, 사람들이 산을 풍성하게 만들기도, 망치기도 한다. 산은 자기를 사랑하고 가꿔주는 사람들에게는 맑은 공기와 건강, 행복과 희망을 선물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산림을 약탈하는 사람들에게는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환경오염, 불행과 절망을 벌로 주는 것 같다. 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풍성하게 가꿔 산이 준 행복과 자연의 축복을 모두 함께 누리는 이 땅의 오늘이 눈물겹게 고맙다. 이 땅의 모든 산을 푸르게 가꾸고 나날이 푸름을 더해가도록 애쓰고 노력해 온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나도 산이 주는 축복을 누리기만 하는 수혜자가 아니라 산을 푸르게 가꾸고 지켜가는 공여자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이 행복을 고향땅 사람들과 함께 누릴 남과 북의 “푸른 통일”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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