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어느 가을에 부치지 못한 편지
낙엽 지는 11월의 우수 속에 커가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나직이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그 한마디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격한 소용돌이가 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리움으로 응축되고 숙연해지는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게 그리움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아픔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제게는 힘입니다. 꿈결에도 한달음에 달려가는 내 고향, 저 북녘에 생존해 계시지만 만날 수 없기에 더 간절하고 애달픈 마음입니다. 한민족 누구나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박힌 분단의 아픔이 더 현실적으로 가슴을 헤집는 우리 부자지간입니다.
평양 교외의 그 곳, 아버지 계시는 곳은 차로 달리면 불과 서너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멀고도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십여 년 전 그곳에 아버지를 두고 못난 이 아들은 떠났습니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시며 여느 때처럼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뿌옇게 안겨왔지만 저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고 또 참으며 돌아섰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결심을 알고 계셨지만 아프신 아버지에게는 그 사실을 말씀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아셨겠지만 이 불효자는 그 길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야 저도 살고 가족도 도와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땅에서도 살 수는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숨 막힌 좌절과 절망의 암연 속에서 제 인생 역시 아버지처럼 속절없이 시들어 갔겠죠.
어릴 때 저는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고 많이 따랐습니다. 전연지역에서 군 복무 만기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인 아버지는 유식하셨고 모르는 게 없으셨죠. 철없던 꼬마가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천문의 세계를 알려주셨고 영어단어와 회화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제 물음에 귀찮으실 만도 하셨겠지만 언제 한 번 화내지 않고 차근차근 제가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주셨습니다.
남존여비의 봉건유습이 뿌리 깊던 그 사회였지만 가정적이고 음식도 잘 하셔서 부부간의 금슬도 좋으셨던 아버지. 가끔 맛있는 도시락을 직접 싸들고 소풍도 데리고 다니시면서 저희 남매랑 재미있는 추억도 많이 쌓아주셨던 아버지.
물론 아버지는 자애롭고 인자하기만 했던 분은 아니셨죠. 때론 사랑의 매도 드시고 늘 저희 남매가 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셨죠. 그런 사랑과 엄격한 훈육이 있어 학창시절을 별 탈 없이 마치고 군복무를 하러 떠나던 날, 저는 저 때문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보게 됐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고 참았던 울음을 저는 터뜨렸습니다.
아버지의 그 눈물의 의미를 군복무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 그것도 경제난과 기아가 그 땅을 휩쓸던 1990년대의 그 어려웠던 날들에 군복무를 하면서 절감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하셨던 말씀의 참뜻과 의미를 말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죠? “남자란 모름지기 자기 앞날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말고 오직 자기의 힘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강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정말 많았지만 아버지의 그 말씀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그 땅을 떠날 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꼭 성공해서 아버지 앞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날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다른 이 땅에서 시행착오도 겪고 넘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며 참고 견뎌냈고 이겨냈습니다.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그 무엇이 난관이고 어려움이겠습니까? 매일매일에, 모든 것에 감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니 어느새 처음보다 훌쩍 커진 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남자는 꼭 군복무도 해보고, 대학도 졸업해야 한다고 하셨죠? 저 여기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사람, 필요한 사람이 됐습니다.
저 지난해 결혼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행복한 미래의 단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땅에서의 행복이 나날이 커갈수록 가슴속 깊이 갈마드는 그리움과 죄책감도 함께 커갑니다. 저의 한국행이 저도 살고 가족도 사는 길이라는 그때의 생각, 통일이 곧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현실의 괴리감이 이리도 클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17살부터 가족을 떠나 지금까지 외지생활만 하면서 제가 굳세게 살아올 수 있었던 힘과 의지, 열정의 근저에는 아버지의 헌신과 희생, 진정한 자식사랑과 훈육의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인생의 롤 모델이고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묵직한 바위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아버지. 제게 주신 사랑과 은혜, 크고 깊기만 한데 이 아들은 이렇게 가깝고도 먼 곳으로 홀연히 떠나와 불효하는 못난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앞에 다시 서는 그 날에는 그 불효를 다 씻을 수 있는 그런 아들이 되어 나타나겠습니다. 아버지.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동토의 그 땅에도 따스한 봄볕 드는 통일의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날까지 건강하시고 힘내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그 땅에서는 한 번도 못해 본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