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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Jan 15. 2020

31. 6.25전쟁의 결과와 참상

그곳에서 6.25는 '북침'이었다(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한민족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던 6.25전쟁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아마 한반도 통일은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통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동족끼리 총을 겨누고 살육을 했던 6.25남침전쟁으로 인해 남북한 모두의 가슴에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았다. 




독일 통일이 한반도 통일보다 먼저 실현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민족처럼 동족상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마 제일 큰 이유였을 것 같다. 3년 넘게 미친듯이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남과 북의 증오와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는 70여 년의 세월로도 다 씻어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6.25전쟁 때문에 한민족의 역사가 바뀌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민간인을 비롯해 백수십만 명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전상자와 포로, 고아가 생겼다. 북한군과 중공군, 남한 내 좌익세력이 대한민국 영토에서 학살한 민간인만 12만 명이 넘는다. 전쟁 당시 북한으로 끌려간 민간인만 10만여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제헌국회의원도 있고 언론인, 법조인, 기술자도 있었다. 



6.25전쟁 기간 동안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 당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 사진은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로 학살당한 함흥 주민들

세계 최초로 비날론을 연구했던 이승기 박사의 경우 김일성이 보낸 북한군에 의해 납북돼 북한에서 과학원 함흥분원 원장으로 일하며 북한 화학무기 개발의 원조가 됐다. 의용군의 미명 하에 강제로 북한군에 끌려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돼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입대하거나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후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계열을 제거할 때 그들 대부분이 처형, 숙청 당하거나 산간 오지로 추방됐다.


광복 후 5년간 독립국가 건설의 생기가 돌던 도시와 마을, 공장들은 잿더미가 됐고 산림은 불타 황폐화 됐다. 북위 38도선을 대체하는 새로운 DMZ가 생겼고 도로와 철길이 끊어졌다. 6.25전쟁 때문에 천만 이산가족이 생기고 전시납북자와 국군포로문제가 생겼다. 흥남항의 비극과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생겼다. 


또 6.25전쟁 때문에 남북이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며 질시하는 비극의 역사가 70여 년 째 지속되고 있다. 6.25로 인한 분단으로 남북의 이질화와 북한 주민들과 청소년들이 영양부족으로 신장이 작아지고 평균수명이 짧아져 타인종화 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2500만 북한 동포들이 김 씨 왕조의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만 명이 짐승만도 못한 학대와 고문, 처형의 공포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정치범 수용소가 운영되고 있고 북한 땅 전체가 철창 없는 수용소가 됐다. 3만 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21세기 새로운 이산가족이 됐다. 김정은은 3대 세습 폭정으로 북한 주민을 노예로 만든 것도 부족해 핵과 대량살상무기로 동족을 겁박하고 있다. 


이 모든 화근의 원인은 바로 6.25전쟁 때문이며 그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정권때문이다. 6.25전쟁 때문에 한민족의 반쪽은 불행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고 다른 반쪽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6.25전쟁, 그 전쟁은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안겨준 김가 정권의 가장 극악한 '원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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