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부끄럽지 않게 여행할 수 있을까
생 루이에 가기로 결정했을 땐 그 곳이 작은 섬마을이라는 것을 알 뿐이었다. 작은 마을을 좋아하고 바다는 더더욱 좋아하는 나로서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나는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에서 잠시나마 여독을 풀 수 있길 기대하며 생 루이행 차에 올라탔다.
허나 생 루이에서의 일정은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내까지 택시비가 500세파프랑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택시 기사가 2,000프랑을 부르며 바가지를 씌운 것이었다. 그 때까지 프랑스어 숫자에 익숙해지지 않아 애를 먹던 나는 택시 기사의 “드밀(2,000)”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귀가 번쩍 틔였다. “노노, 쌩쌍(500)”이라며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1,500프랑이라는 거금을 내고 나서야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세네갈은 유럽에 버금갈 정도로 물가가 비싼 반면 모든 시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저녁께 도착한 도시는 정전이라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배낭 여행자에게는 부담스러운 거금을 치루고 들어간 숙소는 심지어 단수 상태였다. 나는 하루 종일 뒤집어쓴 모래 먼지를 씻어내지도 못한 채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워야 했다.
잔뜩 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도시를 둘러보았지만, 좀체 당하지 않던 사기까지 당해 4,000프랑을 날리고 나자 생 루이에 대한 정이 뚝 떨어졌다. 작은 섬마을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정보도 알아보고 올걸 그랬다는 후회가 막심했다. 예고편이 끝내주게 재밌어서 기대하고 봤다가 실망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예고편이고 시놉시스고 전혀 모른 채 봤는데 의외로 재밌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 생 루이는 예고편을 보지 않고 마침 상영 시간이 맞아 관람했는데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나 마찬가지였다.
“버드 파크에 가봐요. 신기하고 예쁜 새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던 프랑스인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저녁도 어김없이 정전이라 테이블마다 하나씩 올려진 촛불의 빛이 할머니 얼굴 위에서 붉게 일렁였다. 생 루이로 바캉스를 왔다는 그녀는 숙소 레스토랑에서 이치에 맞지 않게 비싼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정전 때문에 촛불을 밝히는 상황이 낭만적이고 즐겁다고 했다. 도무지 예산에 맞는 식당을 찾을 수 없어 하루종일 주린 배를 물로 채우던 나는 그녀의 식탁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버드 파크요? 어떻게 가는데요?”
“숙소에 투어를 신청하면 갈 수 있어요. 도시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당장 내일이라도 생 루이를 떠날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말을 듣자 고민이 됐다. 투어비가 얼마일지 걱정되는 반면 생 루이에서 하나라도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 역시 컸다. 지나는 길에 잠이나 한숨 자려고 들른 도시라면 상관없지만 생 루이는 내가 ‘뭔가’를 기대하고 온 곳이었다. 안 좋은 추억만 잔뜩 가진 채 이 도시를 떠나기엔 영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아침에 일어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투어를 문의했다. 하지만 내가 듣게 된 건 어마무시한 투어비가 아니라 매우 뜻밖의 답변이었다.
“다리가 끊겼다고요?”
“아뇨, 공사중이라 다리가 막혔다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리셉션 직원은 생 루이와 육지를 연결하는 단 하나뿐인 다리가 막혔다는 소식을 심드렁하게 전했다. 옆집 닭이 알을 낳았대도 이보다 진지하게 말했을 것 같다. 내가 만약 오늘 당장 떠나는 버스표라도 들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저러지? 그 생각을 떠올린 나는 곧 김이 빠졌다. 세네갈의 모든 버스는 선착순이니 예매표 같은 걸 들고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직원을 닥달할 일은 애초에 있을 수 없다. 섬에 갇혔다면 다리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인 것이다.
버드 파크는 육지에 위치해 있었기에 내 계획도 자연히 무산됐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시간이 비면 으레 그래왔듯 동네를 산책하기로 했다. 정전이 되도, 단수가 되도, 다리가 끊겨도, 내 손해를 주장하며 역정내는 대신 그러려니 하는 것이 생 루이의 방식이라면 나도 이 곳에 머무는 동안은 그에 따라야 한다. 나는 실망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체념한 걸음걸이로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나와 조금 걷다보니 어느 새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현지 사람들이 생활하는 삶의 터전으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타는 듯한 햇볕의 뜨거움과 비릿한 바다 냄새가 동시에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생선 비린내와 역한 기름 냄새, 버석하게 마른 모래의 까슬함과 소금 쩐내가 섞인 어촌의 냄새였다. 해수욕장에서 맡을 수 있는 상쾌한 바다 내음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냄새를 한 숨 크게 들이마시고 어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름한 건물들, 어디서 주워 온 듯한 물건으로 꾸린 살림살이, 다 헤진 옷을 입고 뛰어다니며 철근이나 벽돌을 장난감 삼아 노는 아이들, 세네갈의 태양 아래 나부끼며 바짝 말라가는 빨래, 박스나 나무 따위로 대충 만든 가판대에 노점을 연 사람들,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냉매도 없이 진열되어 연신 파리가 꼬이는 생선. 꾸미거나 숨긴 것 없는 아주 날 것의 어촌에는 특유의 활기와 생동감, 동시에 고단함이 가득했다.
숙소가 있는 번화가와 무척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휴가 나온 부유한 프랑스인 할머니가 속한 곳이 번화가라면 가난한 배낭여행자인 나에게 어울리는 건 바로 이 곳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골목골목을 돌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문득 주변을 감도는 이상한 분위기에 카메라에서 눈을 뗐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몇몇 현지인들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나는 그들이 사는 공간에 들어와 뭔가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귀찮은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2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원시부족을 봤던 일이 떠올랐다. 그들은 본래의 방식대로 살고 있을 뿐이었지만 여행자인 나에게 그들의 의복, 장신구, 구멍을 크게 뚫은 입술이나 색색깔로 칠한 얼굴은 다시 없을 구경거리였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내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사진을 찍었으니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돈을 건네는 내 손이 천박하게 느껴져 한동안 자괴감에 시달렸었다.
첫 여행이라 어떤 자세로 새로운 세상을 대해야 할 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시기였다. 당시의 나에겐 사람이든 건물이든 풍경이든 모두 ‘신기한 것’으로 느껴졌으니까. 현지인의 삶을 존중하는 법에 한참 미숙했다. 여행을 계속하며 나의 무지함과 무례함을 여러 번 반성하고 그들의 삶에 자연스레 섞여드는 방법을 고민했지만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의 반대편에 와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여전히 산책 중이던 나에게 한 아주머니가 역정을 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채 그녀에게 사과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다리가 다시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길로 도망치듯 생 루이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