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코로나가 터졌다. 원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영국에 좀 더 남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냥 한국에 돌아온 것이 다행이지 싶었다. 무엇보다 학교 수업을 온라인으로 듣게 된 친구들을 보며 '다른 전공도 아니고 그림 수업을 온라인으로 듣기에는 무리가 있을 텐데' 하는 마음과 비대면 수업은 대면 수업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이들을 향한 이상한 측은지심까지 있었다.
그랬던 내가, 그것도 얼마든지 대면 수업이 가능한 2024년에, 내 돈까지 내가며 기꺼이 온라인 그림 수업을 듣기 시작한다. 그것도 영국 시차에 맞추느라 한국시간으로 저녁 7시부터 그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참여해야 하는 수업이다. 여기까지 오기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이번 글에선 첫째 주 수업을 들으며 받은 인상과 배운 점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보겠다. 졸업을 하고 가장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대학생으로서의 기록을 많이 남겨놓지 못했다는 건데, 나중에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똑같은 아쉬움을 갖지 않기 위하여 시작해 보는 글이다.
<Drawing from the National Gallery>
Tutor: A
수강신청 전에 미리 받아본 course list를 살펴볼 때 단번에 눈길을 끌었던 수업. 평소에도 명화를 따라 그리는 걸 즐겨 했기에 이 수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수업 설명에 적혀있던 강렬한 한 줄:
"... This is not a course in copying but rather transcription; translating what you observe into your own drawing..."
(이 수업의 목적은 명화를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관찰한 것들을 당신의 그림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복제와 전사(轉寫)의 차이는 무엇인가? 파블로 피카소가 "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뛰어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말한 게 생각나는 대목이다. (도둑놈같이 아무도 모르게 내 걸로 만들어버리라는 소리로 대충 이해는 한다.) 아무튼, 그림 그리는 사람치고 예술사나 거장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나에게 딱 필요한 수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튜터 A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내준 drawing prompt는 Tribute Money 그림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남자를 그려보라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 5분 동안 내가 가진 연필 중 가장 뚱뚱한 9B로 화면에 있는 뚱한 표정의 남자를 그렸다. 사실 그림에 손을 놓은지 거진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차라서 딱 봐도 그림이 엄청 경직되어 있다. 그림을 다 그리고는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에 그림을 업로드했다. 나와는 달리 배경을 그려 넣은 사람도 있었고 남자의 옷 주름에 좀 더 초점을 둔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그림을 볼 때 가장 짜릿한 건 같은 대상을 모두가 제각기 본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 누구도 실재를 그대로 간파하고 있지 않은 셈이다. A를 이렇게나 다르게 보고 인식하는데 과연 누가 정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른 감각기관보다 눈이 가장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가 '피상적이다'라고 부르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대개 눈으로 강렬히 다가오는 것들이다. 어쨌거나 그림을 본다는 건 한 사람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일이다.
두 번째 drawing prompt는 Titian의 그림 Diana and Actaeon를 보고 리듬에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첫 번째 그림이 너무 딱딱했기에 이번엔 좀 더 부드럽고 유려한 선을 써보고자 했다. 첫 그림은 연필, 두 번째는 콘테를 썼다.
세 번째 prompt는 오직 선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야 했다. 나의 몇 안 되는 자랑 중 하나가 선이라 그런지 가장 반가웠던 prompt였는데, 튜터에게도 꽤 좋은 평을 들어서 그간 치열하게 선과 겨루었던 시간들이 조금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Titian의 다른 그림 Diana and Callisto를 그려보는 것으로 수업 마지막을 장식했다. A3 남짓한 종이에 10-11명 정도의 인물을 한 번에 옮겨오는 것이 부담되어 스케치북에 자그마하게 썸네일 스케치를 해보았다. 확실히 한 번에 눈에 들어오는 스케일은 가지고 놀기에 훨씬 수월하다. 왜냐하면...
A3 종이로 넘어오자마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기 때문이지. 이번 그림에는 1시간 30분이라는 가장 긴 시간이 주어졌는데 이걸로 한 시간을 꼬박 써버렸다.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인체 비율이나 디테일 같은 것들에 집중하다 보니 모든 균형이 어그러진 것이다. 이렇게 다시 드러나는 삶의 진리. 큰 그림을 보자! (literally)
그래서 이번엔 팔이 얼굴에 달려도 상관하지 않을 테다, 하는 전투적인 마음으로 두 번째 그림을 시작했다. 작은 것들에 집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아니야 흘려보내야 해' 하며 계속해서 큰 그림과 덩어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 즐거움을 주는 부분들이 꼭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이 그림에선 개의 발톱과 아기 동상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후에 튜터는 아기 동상 분수가 rather seductive 하다고 코멘트를 해주었다.) 이전 그림은 한 시간을 써도 완성을 못했는데 이 그림은 그에 반도 안 되는 시간으로 끝낼 수 있었다. 역시 주어진 것보단 자세가 중요하다.
굉장히 illustrative 하고 재미있는 요소가 많다는 평을 들으며 마무리된 첫 수업. 정말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그림이 주는 설레임이 참 반가웠던 7시간이었다. 그 여흥을 가라앉히느라 잠에 들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즐겁고 감사했다.
한 주에 수업을 세 개씩 듣고 있어서 원래는 한 포스팅에 세 수업을 모두 쓰려고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양이 너무 방대하다. 나눠서 쓰든 한 주에 한 수업만 포커스를 두고 쓰든가 해야겠다. 이러나저러나 꾸준히 할 수 있는 길로 모색해 봐야지.
/
업데이트 안 하는 게으른 인스타그램
@pinecone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