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의 기억

by 비움과 채움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아버지께서는 어김없이 정갈한 두루마기를 차려입으셨다. 마치 오래된 의식을 치르듯, 말없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서시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린 마음에도 그날만큼은 집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 돌아오신 아버지는 늘 술기운을 안고 계셨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눈빛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셨다.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꺼내셨다.


“만세운동을 하다 잡혀간 큰 형님은 일본 순사의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셨단다…”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가족을 잃은 비통함이 세월을 건너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평소 온화하고 너그러우셨던 아버지였지만, 일본 이야기를 꺼내실 때면 표정이 굳어지셨고, 막걸리 잔을 연거푸 비우셨다. 그 모습 속에는 분노라기보다 삭이지 못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들렸던 말들이, 세월이 흐른 지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들의 용기와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서 있다.


오늘, 삼일절 아침. 태극기를 달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펄럭이는 태극기 속에는 단지 한 장의 국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눈물과 큰아버지의 희생, 그리고 이 땅의 순국선열들의 뜨거운 외침이 함께 깃들어 있는 듯하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외쳐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그 외침이 과거의 메아리가 아니라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문득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이렇게 어렵게 지켜내고 이뤄낸 대한민국인데, 오늘의 정치 현실은 과연 선열들의 뜻에 부합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나라와 국민의 안위보다 각자의 이해와 자리다툼에 몰두하는 모습이 볼 때마다, 그날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던 투사들은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삼일절은 단지 기념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날이어야 하지 않을까. 선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독립만세’라는 외침이 오늘의 책임과 양심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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