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1988 다저스가 야구에 남긴 유산.

by 송진

"그의 인생에는 하루도 '사소한' 날이 없었다(There was no small day in his life)" 토미 라소다가 세상을 떠난 지난 9일, 오럴 허샤이저가 한 말이다. 그랬다. 토미 라소다의 인생은 한 순간, 한 마디가 늘, 모두 진지했다. 마치 연출된 영화속을 사는 것처럼 그 행동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고, 그 말 한마디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허샤이저가 라소다감독을 회상하는 그 장면에서, 라소다감독의 전부였던 다저스 야구는 특별한 하나의 시즌으로 모아졌다. 한국에서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다저스 시즌은, 너무나 영화같아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고 불린다. 그 시즌 다저스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기적을 펼쳐냈고, 그 한 가운데에는 라소다감독을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뜨거운 우정이 있었다. 그 우승의 여정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할리우드에서 쓰여진 영화 각본으로만 가능한 스토리 같았다. 그래서 실제로 MLB Network에서는 "할리우드에서만 가능한 (Only in Hollywood)"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그 시즌을 표현했다.<사진=MLB네트워크 화면 캡처>



영화의 도시에서 만들어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챔피언 스토리. 1988년 다저스의 여정은 그들이 어떤 팀이었는지를 알아야 시작할 수 있다. 1987년 메이저리그는 26개 팀 리그였고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신시내티, 애틀랜타 등과 함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6 팀 가운데 하나였다. 다저스는 1987 시즌 73승 89패 승률 0.451을 기록했다. 이긴 경기보다 진 경기가 더 많은 팀이었다. 지구 4위. 말 그대로 우승 경쟁은 커녕, 지구 1위 경쟁을 두고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팀이었다.



다저스의 1988 시즌은 네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가운데 아래 토미 라소다가 보인다. 라소다를 감독으로 만든 단장은 가운데 위, 알 캄파니스다. 브루클린 다저스 2루수 출신 캄파니스는 1968년부터 1987년까지, 21년간 다저스 단장을 지냈다. 캄파니스는 4차례 월드시리즈에 올라 1981년 챔피언 반지를 가져왔다. '팀 다저스'에 중추적 역할을 한 그는 1987년 4월, ABC 방송 '나이트라인'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한 순간에 해고됐다. 캄파니스의 뒤를 이어 단장을 맡은 프레드 클레어(왼쪽)는 기자 출신으로 당시 홍보팀의 리더였다. 시즌 중간에 단장직을 넘겨받은 클레어의 사실상 첫 시즌이, 1988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을 만든 팀의 구단주가 오른쪽의 신사, 피터 오말리였다.

클레어 단장은 1988 시즌을 앞두고 선수단의 변화를 모색한다. 팀을 이끌어줄 리더와 선수단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판단에 커크 깁슨, 에릭 데이비스(외야수), 알프레도 그리핀(유격수), 제이 하웰, 제시 오로스코(투수) 등베테랑을 합류시켰다. 이 가운데 깁슨은 다저스 라인업의 중심타자로 해결사 역할을 해 줄 간판이었다. 깁슨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1986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상대 미네소타 트윈스)에 끌어올린 홈런-타점 형의 타자였다. 그의 약점이라면 128/162 경기에 출전한, 유리 같은 무릎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깁슨은 197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2번째로 지명된 '황태자'였다. '기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미시건에서 태어나 고교-대학(미시건 스테이트) 시절부터 대형타자(190cm/97kg)로 촉망 받았다. 미시건주에 위치한 디트로이트가 그를 1라운드에 지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순조롭게 팀에서 간판 타자로 자리잡았지만 '원클럽 맨'이 되지는 못했다. 1987 시즌이 끝난 뒤, 디트로이트는 자유계약선수 깁슨에게 재계약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에게 러브콜을 던진 구단은 중심타자와 한방, 경험을 지닌 정신적인 리더를 원하는 다저스였다. 깁슨은 그렇게 고향과 친정팀을 떠나 할리우드가 있는 캘리포니아 LA에 합류했다.


당시 다저스가 깁슨을 합류시켜 타선을 강화했다면, 투수진에는 오럴 허샤이저(왼쪽)가 있었다. 허샤이저는 1985년부터 3년 동안 49승(19-14-16)을 거둔 마운드의 기둥이었다.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으로 고등학교 진학 이후 야구를 시작한 허샤이저는 1979년 드래프트에서 17라운드, 전체 440번째에서야 다저스의 지명을 받았다. 깁슨이 1라운더였던 것과 대비가 된다. 입단할때만해도 평범한 구위를 지닌 투수였던 허샤이저는 마이너리그에서 4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마운드에서의 지혜와 투구 관리 능력으로 듬직한 선발투수가 됐다. 싱커, 커브, 투심 등 주로 땅볼 유도형 투수였던 그는 압도적인 구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타자들과의 승부에서 '도망다니지 않는다' 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허샤이저는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토미 라소다가 붙여준 별명이다. 라소다는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그 핵심을 짚어내며 이를 명쾌한 상징과 적절한 은유로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그가 연설의 달인이면서 수 많은 명언을 남긴 배경도 그런 능력에서 비롯된다. 라소다는 입단 초기 투수 허샤이저의 약점이 타자를 공격하지 않고 수비하는 타입의 투구를 하는데 있다는 걸 단숨에 짚어냈다. 그는 허샤이저에게 불독의 용맹, 투지, 끈질김을 닮으라는 의미로 별명을 지어주고 그렇게 불렀다. 라소다가 별명을 불독으로 지어준 의도는 그가 불독 같아서라기 보다는, "불독처럼 되어라"는 동기부여 차원이었다. 허샤이저는 그렇게 됐고, 1988시즌을 시작할 때는시즌 15승 언저리를 늘 확보해주는 투수로 성장해 있었다.


1988 다저스의 시즌과 허샤이져를 말 할 때 빠질 수 없는 대목은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이다. 당시 메이저리그 기록은 다저스 레전드 돈 드라이스데일(오른쪽)이 1968년 시즌 세운, 58.2이닝 연속 무실점이었다. 허샤이저는 8월 30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5회에 2실점 한 뒤 나머지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이후 선발 등판 6경기에서 1점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허샤이저는 6연속 9이닝+ 무실점(55이닝)을 기록했다.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49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을 때만 해도, 정규시즌에서 한번만의 기회를 남긴 허샤이저가 기록을 깨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9월 28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 허샤이저는 9회까지 또 한번 무실점을 기록했고, 하필 경기는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소다감독은 10회 연장에서 허샤이저를 마운드에 올렸다. 허샤이저는 1이닝을 더 무실점으로 막아내 마침내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 경기의 라디오 중계 아나운서는 기록보유자 드라이스데일이었고 경기는 연장 16회까지 이어져 파드리스가 2-1로 이겼다)

그날 경기에서 9회를 마친 허샤이저가 더 이상 마운드에 오르지 않을 것처럼 자켓을 입는 장면. 그러나 야구의 신은 그를 원했고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른다. 다저스는 정규시즌에서 23승과 함께 59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드라마 같은 대기록을 세운 허샤이저를 앞세워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다. 전년도 지구 4위, 승률 5할 언더였던 그들이었다.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에서 동부지구 1위 뉴욕 메츠를 상대한다. 1986년 월드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메츠는 2년이 지난 1988년에도 드와이트 구든, 대럴 스트로베리라는 투/타의 기둥과 데이비드 콘, 론 달링 등의 투수진을 앞세워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다. 팬들은 메츠를 '마이티(강력한, 전능한) 메츠'라고 불렀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연상시키는 다저스와 메츠의 대결은 1차전부터 7차전까지 한 순간도 숨돌릴 틈 없이 업치락 뒤치락하며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다저스는 전력상 열세였지만 허샤이저가 있었다. 1차전 선발로 나선 허샤이저는 흔들리지 않고 잘 던졌다. 8회까지 무실점. 스코어보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다저스는 2-0의 리드를 잡고 9회초를 맞았다. 메츠가 마지막 반격에서 허샤이저를 흔들었고, 다저스 라소다감독은 마무리 제이 하웰을 마운드에 올렸다. 하웰의 주무기는 커브였다. 그런데 이날따라 하웰의 제구가 흔들렸다. 메츠는 거세게 몰아쳐 3점을 뽑았고, 40km를 뒤져서 달리던 마라톤을 마지막에 역전해 결승테이프를 끊은 것 처럼, 3-2로 경기를 가져갔다. 다저스로서는 에이스를 내세우고 꼭 잡아야할 홈에서의 1차전을 허무하게 내준 셈이었다. 메츠는 별명처럼 또 한번 전능한 힘을 보여 주었고, 다저스는 허탈한 절망간 속에서 험난한 2차전을 맞이해야 했다.

7전 4선승제 시리즈에서 혹자는 "2차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1차전을 이긴 팀이 2차전 마저 승리할 경우 그 시리즈는 일방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고, 1차전을 내준 팀이 2차전을 잡을 경우는 그 기세가 이어져서 오히려 유리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렇게 중요한 2차전을 앞두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메츠 2차전 선발투수 데이비드 콘이 인터뷰에서 다저스 선수들의 자존심을 긁어대는 말을 한 것이다. 콘은 다저스 1차전 패전투수 하웰의 구위가 "마치 고딩 투수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고 자극적으로 말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었고, 미디어가 실시간으로 유통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2차전날 아침 신문을 통해서 그 소식이 퍼졌다. (사진 노란색 부분) 다저스 선수들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리고 오히려 더 똘똘 뭉쳤다. 2차전에서 다저스는 기다렸다는 듯 초반에 콘을 두들겨 2회에 5-0의 리드를 잡았다. 다저스는 6-3 으로 이겨 시리즈의 균형을 맞췄다.

3차전은 뉴욕으로 장소를 옮겨 열렸다. 또 하나의 변수가 3차전을 앞두고 생겼다. 당초 현지시간 금요일 저녁에 예정됐던 3차전은 그날 내린 거센 비 때문에 토요일로 하루 연기되어 열렸다. 그리고 다저스 라소다 감독은 1차전 선발 허샤이저를 3일 휴식뒤 마운드에 올렸다. 열세로 여겨지는 다저스가 시리즈를 가져갈 방법은 에이스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허샤이저는 선발의 역할을 했지만 구위는 평소보다 떨어졌다. 그날 허샤이저는 6회까지 던졌고 한때 3-1로 앞섰지만 결국 3-3 동점을 허용하고 내려갔다. 불펜대결이 이어졌다. 8회초 다저스가 먼저 1점을 뽑았고, 8회말 곧바로 마무리 하웰을 올려 승리를 지키려 했다. 그런데 하웰이 첫 타자를 상대하는 장면에서 메츠 데이비 존슨감독이 심판에게 무언가 항의를 했고, 하웰의 글러브에서 송진(pine tar)을 발견한 주심은 하웰을 곧바로 퇴장 시켰다. (사진. 하웰은 시리즈 6차전까지 출장정지 징계를 받는다). 마무리 투수가 뜻하지 않게 마운드를 내려간 다저스는 흔들렸고, 메츠는 무려 5점을 뽑아 8-4로 3차전 승리를 가져갔다. 다저스는 에이스 허샤이저를 내세운 1,3차전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4차전은 다저스에게 벼랑 끝이었다. 만약 져서 1승3패가 된다면 시리즈는 절망이다. 에이스 허샤이저는 전날 선발로 던졌고, 마무리 하웰은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더구나 메츠 선발은 에이스 드와이트 구든이었다. 위력적인 구위와 이름의 이니셜 D로 자연스럽게 '닥터 K'로 불린 그는 1차전 선발로 나와 승패없이 2실점, 10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위력을 선보였다. 구든은 1회초 잠시 흔들리며 2점을 내줬지만 곧바로 위력을 찾았다. 메츠는 4회 3점, 6회 1점을 뽑아 4-2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리고 9회초, 구든이 여전히 2점차의 리드를 안고 마운드에 올랐다. 손에 잡일 듯한 승리가 조급했을까. 다저스 선두타자 셀비가 볼넷을 골라냈다. 그리고 다음타자 마이크 소시아(전 LA 에인절스감독)가 볼카운트 0-2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벼락같은 홈런을 때렸다. 4-4 동점이 됐다. 시즌 동안 고작 3개의 홈런만을 기록한 '소총수' 소시아가 그 순간에 홈런을 때릴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고 기사회생한 다저스는 연장 12회초 커크 깁슨의 솔로포 한방으로 5-4 리드를 잡았다. 12회말, 그냥 물러설 메츠가 아니었다. 메츠는 1사 1,2루 찬스를 잡았다. 타순은 왼손 중심타자 헤르난데스-스트로베리로 이어졌다. 다저스는 왼손 스페셜리스트 제시 오로스코를 올렸다. 오로스코는 헤르난데스를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 위기를 자초했고 간신히 스트로베리를 내야 뜬 공으로 유도해 실점을 막았다. 위기는 계속됐다. 2사만루. 그리고 타자는 오른손 케빈 맥레이놀즈였다. 마운드로 라소다 감독이 걸어갔다. 투수교체?

허샤이저가 불펜에서 뛰어 오고 있었다. 마무리 제이 하웰이 출장정지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장승부로 불펜은 바닥이 났고 다음날 선발투수 팀 벨처는 호텔에 있었다. 엔트리에 단 하나 남은 투수가 전날 선발로 던진 허샤이저였다. 1,3차전 선발에 이어 4차전 불펜 등판. 당시 요일로 따지면 화요일, 토요일 선발로 14이닝을 던지고 일요일에 다시 마무리로 등판한 것이다. 팀의 1선발을 1승2패로 몰린 4차전에 불펜으로 등판 시키는 상황은, 2020 한국시리즈에서 NC 이동욱감독의 투수 기용과도 같다. 단기전에서 무슨일도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전략도 가능하다. 내일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어서다. 허샤이저는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을 잡아내 승리를 지켰다. 그렇게 시리즈는 2-2로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간 4차전 12회초 커크 깁슨의 홈런 한방은, 월드시리즈에서의 명장면에 대한, 어떤 복선이 된다.

두 팀은 5,6차전을 나눠 가지며 결국 7차전까지 시리즈 승부를 끌고갔다. 마지막 승부였다. 시리즈 2차전 비 탓에 하루를 더 쉬었기때문에 3차전부터는 쉬는 날 없이 매일 경기를 했다. 다저스는 토요일 선발, 일요일 마무리로 나온 허샤이저를 수요일 7차전에 다시 선발로 내세웠다. 혹사, 무리의 논란속에 마운드에 오른 허샤이저는 '전능한' 메츠는 상대로 어떻게 던졌을까. 놀랍게도 완.봉.승. (다저스 6-0) 이었다. 그는 9이닝을 1점도 내주지 않고 혼자 던졌다. 1차전부터 거의 모든 순간 숨막히는 상황이 이어지는 혼전이었다. 그렇게 전문가 모두가 메츠가 이길 거라고 예상했던 시리즈를 다저스가 이겼다. 1,3,7차전 선발에 4차전 마무리를 기록한 허샤이저가 시리즈 MVP가 됐다. 1984년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활약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혼신의 투구였다. 봄에는 눈 여겨 보지 않았던 할리우드 팀, LA 다저스가 조각 조각의 드라마를 연결하며 마침내 '가을의 고전'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갔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메츠보다 더 강한 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였다. 그들은 정규시즌 104승(다저스 94승, 메츠 100승)을 올렸고 덕아웃에는 경험과 지략 모두를 인정받는 토니 라루사가 버티고 있었다. 팬들은 아예 그들을 '수퍼 팀'이라고 불렀다. 선발에 데이브 스튜어트, 밥 웰치, 스톰 데이비스 등이 있었고 불펜에 릭 하니컷, 마무리 데니스 에커슬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선의 '팔뚝 형제' 호세 칸세코(42홈런), 마크 맥과이어(32홈런)가 다저스 최다홈런 커크 깁슨(25개)에 비해 압도적인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4승 무패로 빗자루질 하고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7차전 내내 숨막히는 승부를 펼치며 체력이 떨어진 다저스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또 한번 전문가들은 모두 오클랜드의 승리를 예상했다. 다저스는 1차전에 에이스 허샤이저가 나설 수 없는데다, 팀의 주포 커크 깁슨 마저 무릎, 햄스트링 부상으로 선발 라인업에서 빠졌다. 깁슨은 아예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오클랜드는 1회 2점을 내줬지만, 2회 곧바로 호세 칸세코가 만루홈런을 터뜨려 전세를 뒤집었다.(사진)

만루홈런 한방으로 역전에 성공한 오클랜드는 이후 다저스의 반격을 1점으로 막아냈고 9회가 찾아왔다. 4-3으로 앞선 9회말, 오클랜드 불펜의 문을 열고 데니스 에커슬리가 나왔다. 엑커슬리는 은퇴후 2004년 첫 자격을 얻은 그 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세이브'의 상징이다. 스리쿼터 보다 약간 낮은 팔 회전으로 홈플레이트 뒤쪽을 통과하는 '백도어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다. 에커슬리는 1988 정규시즌 45세이브로 리그 구원왕을 차지했고,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4경기 4세이브를 기록하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다저스 타순은 6번부터 하위 타순으로 내려가는 순서였다. 에커슬리는 첫 두 타자를 가볍게 잡아냈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에 몰린 다저스로서는 큰 것 한방을 때려줄 깁슨이 절실했다. 그러나 깁슨은 타석은 물론 덕아웃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경기내내 클럽하우스 안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고, 9회말이 시작될 무렵에서야 클럽하우스 매니저와 타격감을 찾는 스윙을 시작했다. 월드시리즈 1차전, 1점차로 뒤진 9회말 2사라면 '마지막 순간'이다. 그런데 다저스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한방이 있는 깁슨을 불러내지 않았다. 그 해 0.196의 타율을 기록한 데이비스를 먼저 대타로 내세웠고, 데이비스가 볼넷을 골라내자 대기 타석에 있던 데이브 앤더슨을 불러들이고 클럽하우스에 있던 깁슨을 내세웠다.

장내 아나운서가 "대타 커크 깁슨!을 부르자 관중들이 모두 일어섰다. 방송에서 빈 스컬리는 "누가 나오는 지 함 보세요.(Look who's coming up)" 이라고 했다. 기립박수와 함께 깁슨이 방망이를 들고 나섰다. 사진 왼쪽에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앤더슨의 모습이 보인다. 깁슨은 왼쪽 햄스트링과 오른쪽 무릎이 아팠다. 뛰는 것은 물론 걷고 힘을 쓰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깁슨은 에커슬리의 바깥쪽 빠른 공과 멀리서 돌아 들어오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의식한 듯, 오른쪽 발을 홈플레이트에 가까이 딛는 극단적인 클로스 스탠스를 취했다. 오클랜드 포수 론 해시가 앉아있는 위치도 먼쪽이다.

그리고 8구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졌다. 위 사진에 깁슨이 타석에 들어서고, 아래 사진에서 깁슨이 마침내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었다. 초구 빠른 공 파울, 2구째 빠른 공 파울로 에커슬리가 0-2의 유리한 카운트를 잡았으나, 깁슨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두개의 파울과 세개의 볼을 골라내며 버텼다. 그 사이 1루주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7구째 볼에 2루 도루에 성공해 에커슬리를 압박했다. 운명의 8구는 에커슬리의 주무기, 백도어슬라이더였다. 그 공은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듯 하더니 약간 가운데로 몰렸다. 깁슨은 오른발을 홈플레이트쪽으로 집어 넣으며 팔을 뻗어 배트를 휘둘렀다. 공이 배트의 중심에 맞는 경쾌한 타구음과 함께 타구 발사각이 이상적인 포물선을 그렸다.

기적 같은 역전 끝내기 2점 홈런이었다. 깁슨은 맞는 순간 홈런을 예감한 듯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모두가 일어섰다.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는 "사실인 것 같지 않은(improbable) 시즌에 불가능한(impossible) 일이 일어났다"라고 그 순간을 표현했다.

깁슨은 2루를 돌며 특유의 세리머니를 했다. 오른팔을 두번 잡아당기는 동작이었다. 이 세리머니는 이후 홈런타자가 극적인 장면에서 따라하는 동작이 되기도 했다. 깁슨이 덕아웃에서 나올때부터 라소다감독이 두 팔을 치켜 들고 나오는 순간을 현장음과 함께 영상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면. (관련링크)

완전 불리할 것으로 여겨졌던 1차전에서 극적으로 이긴 다저스는 이후 거칠 것이 없었다. 앞서 7차전 시리즈에서 2차전의 중요성을 앞서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다저스는 2차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한' 허샤이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샤이저는 2차전에서 3안타 완봉으로 눈부시게 던졌다. 오클랜드가 자랑하는 칸세코-맥과이어가 침묵에 빠졌고, 첨병 카니 랜스포드도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 3안타는 데이브 파커 혼자 때려냈다. 파커 혼자 3안타를 때렸다는 건, 연속 안타는 커녕 9타자만에 안타가 하나씩 나왔다는 얘기다. 상대를 침묵시킨 허샤이저의 호투속에 다저스는 6-0으로 이겼다. 막강할 것으로 예상했던 타선이 침묵에 빠지면서 시리즈는 다저스의 견고한 득점 억제력에 오클랜드가 당황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판세가 됐다. 오클랜드 간판타자 칸세코와 맥과이어는 시리즈 내내 각각 1안타만 기록했다. 다저스는 3차전을 내줬지만 4,5차전을 연달아 이겨 4승 1패로 시리즈를 마감하고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차지했다. 허샤이져는 5차전에서 또 한번 완투승(5-2) 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23승, 59이닝 연속 무실점에다 리그 챔피언십 4번 등판, 월드시리즈 2회 완투승이 허샤이저가 1988시즌에 기록한, '말이 안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허샤이저는 월드시리즈 MVP 마저 차지했다.

"아무도 우리가 디비전 1위가 될 거라고 하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가 막강한 메츠에게 이길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거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 다저스가 월드시리즈를 이겼다. 우리가 챔피언이다!" 토미 라소다감독은 캐릭터가 강하고 직설적이다. 많은 명언을 남겼고 연설도 아주 잘한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서다. 그는 다저스가 공격력이 약하고 투수진 가운데는 하샤이저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득점을 많이 하겠다는 전략보다는 최대한 차곡차곡 점수를 얻고 실점을 최소화 하는 전략으로 시리즈를 운영했다. 절체절명의 낭떠러지에서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허샤이저를 기용했고,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깁슨을 아끼고 아끼다가 9회말 2사 1루의 역전상황에서 기용해 대타, 역전, 끝내기 홈런을 만들어 낸건, 라소다 감독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상대 감독 데이비 존슨(메츠), 토니 라루사(오클랜드) 역시 지략가 였지만, 1988시즌의 주인공은 토미 라소다였다.

라소다 감독 특유의 동작은 두 팔을 번쩍 위로 치켜 드는 거다. 위 사진은 월드시리즈 5차전이 끝나고 4승 1패로 시리즈를 결정지은 뒤, 방문팀 클럽하우스에서 우승 세리모니를 할 때다. 라소다 감독은 깁슨이 끝내기 홈런을 때렸을 때, 덕아웃에서 뛰쳐 나오면서도 위와 같이 두 팔을 어깨위로 치켜 올렸다.


다저스의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1988시즌은 그렇게 스포츠가 줄 수 있는 많은 감동을 남겼다. 중하위권 팀을 새로 바뀐 단장이 새롭게 만드는 과정. 그 과정에서 리더십, 야구의 전략이 커크 깁슨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발현이 되는 부분. 허샤이저라는 걸출한 투수가 야구에서 '에이스'라는 역할을 하나씩 보여주는 모멘텀. 토미 라소다라는 리더가 단기전에서, 어떤 기준으로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그 영혼의 리더십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 냈는지, 1988 다저스의 시즌에 모두 녹아있다.


그리고...30년이 지난다.

1988년의 기적 같은 드라마가 30년의 세월을 등 뒤로 돌려보낸 2018년 봄, 그 해 4월 26일이다. LA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 앞서 특별한 손님을 시구자로 초대한다. 깁슨이었다. 깁슨은 1988년 그 홈런 한방으로 다저스에 챔피언반지를 안겨 준 뒤, 1990년 시즌을 끝으로 다저스를 떠났다. 그는 이후 캔자스시티, 피츠버그를 거쳐 친정 디트로이트로 돌아갔고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깁스은 은퇴뒤 방송 해설자로 활약했고 2003년부터는 디트로이트에서 코치 유니폼을 입고 현장에 복귀했다. 그는 2007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2010년에는 시즌 초반 팀을 떠난 전임 AJ 힌치(휴스턴 우승감독) 의 뒤를 이어 애리조나 감독이 됐다. 그리고 2011년에 정식 계약을 맺은 뒤 그 해 애리조나를 2007년 이후 첫 지구 1위팀으로 이끌었다. 정식 감독으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깁슨은 메이저리그 감독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2011년 내셔널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그는 선수로서 화려한 경력에 이어 방송 해설, 코치, 감독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2011년 내셔널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명성을 높인 이후, 팀 성적이 저조하게 되며 2014년 팀을 떠난다. 재기를 모색하던 그는 2015년 4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그가 파킨슨씨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모든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미시건에 거주하며 투병에 들어간다. 깁슨의 몸은 조금씩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되고, 그 화려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조금씩 깁슨의 이름을 잊어 간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이 약해진다고 해도 영원히 그를 잊을 수 없는 다저스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늦기 전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든다. 특히 허샤이저는 그와 비슷한 연배(깁슨 1957년, 허샤이저 1958년생)이면서, 1988시즌 투/타의 기둥 역할을 했던 콤비라서 그 마음이 더 간절했다.

깁슨은 다저스타디움에 도착한 뒤 자신의 흔적이 담긴 소품을 둘러보고, 허샤이저와 조우했다. 1988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드라마를 만들었던 두 주인공은 그 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다. 영원한 '다저스 맨'일 것 같았던 허샤이저도 1994년 시즌을 끝낸 뒤 클리블랜드, 샌프란시스코, 뉴욕 메츠를 거쳐 2000년 다시 다저스로 돌아왔고 그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허샤이져는 은퇴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박찬호와 코치-선수로서 만나는 등 지도자로 활약하다 방송으로 전환, 다저스 구단 방송에서 해설가로 일하고 있었다.


깁슨은 뻐뻣해지는 몸으로 클럽하우스 뒤편에서 시구 연습을 한다. 그의 동작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연민을 느낀다. 조금씩 어눌해 지는 동작이 야속하기만 하다.


허샤이저는 그런 깁슨에 대해 얘기하면서 북받치는 감정에 결국 눈물을 쏟아낸다.

깁슨은 그라운드로 나서기 직전, 1988년 그 당시 계단 몇 개를 밟고 나갔던 덕아웃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출구 근처에서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월드시리즈 사상 손 꼽히는 명 장면으로 남는 그 드라마을 쓴 다저스타디움 마운드에서, 커크 깁슨이 시구를 한다. 그 공을 던지기 전, 허샤이저는 마이크를 잡고 관중 모두에게 깁슨이 1988년 그 홈런을 때리고 베이스를 돌며 보여준 그 세리머니를 함께 해 달라고 말한다. 감동의 장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깁슨의 손을 떠난 공은, 그의 영원한 동료가 내민 글러브에 꽂힌다.


허샤이저 였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30년전 그 자리에서 다저스에게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안겨 주었던 두 사람이다. 혼자 이룰 수 없는 야구의 가치,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힘을 모아 이루어 낸 1988 다저스를 상징하는 두 사람이다. 공을 던지면 전부가 아닌, 그 던진 공을 누군가 받아야 하나가 이루어지는 야구의 본성을 그 시구는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다저스라는 정체성으로 보낸 30년전의 시간을, 30년이 흐른 뒤에도 지금의 멋진 가치로 한번 더 만들어내는 그런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30년만의 귀향. 디트로이트 색깔이 강한 깁슨이지만, 이날의 다저스타디움 방문은 너무나 특별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으로 한번 더 음미하고 싶다면. (관련 링크)

2018년 봄날의 다저스타디움은 1988년의 파도와 같던 격정을 잠재운 평온한 엄마 품 같았다. 다저스는 1988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구단주가 세번 바뀌었다. 그날의 영광을 만든 오말리가문 시절을 지나 루퍼트 머독, 프랭크 매코트에 이어 구겐하임을 앞세운 지금의 구단주 그룹이 그 소유주가 됐다. 구단 오너에따라 그 성향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저스의 가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동안 다저스는 한번도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1988이라는 숫자는 그들에게 여전히 가장 고귀한 유산(legacy)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깁슨의 시구를 통해 그 1988을 한번 더 그들의 빛나는 자산(asset)으로 만들었다.

다저스는 1988년 월드시리즈 우승이후 29년이 지난 2017년에야 월드시리즈 문턱을 넘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맞붙은 월드시리즈에서, 그들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졌다. 그리고 깁슨이 시구를 한 2018년, 또 한번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지만, 이번에는 워싱턴 내셔널즈에게 졌다. 2018년 깁슨의 시구때 인터뷰에 응한 토미 라소다는 눈에 띠게 수척했다. 몸에 푸른 피가 흐르는 라소다는 다저블루, 로 상징되는 그 다저 스피릿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꼈다. 그리고 2년뒤, 2020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는 탬파베이 레이스를 6차전에서 뿌리치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토미 라소다는 그 경기에, 그 다저스타디움에서 다저스의 우승을 지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기는 라소다가 현장에서 지켜본,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됐다.

토미 라소다와 인생의 동반자이면서 다저스의 상징이라면 바로 빈 스컬리다. 두 사람은 1927년생으로 동갑이기도 하다.스컬리는 1950년 브루클린 다저스때부터 2016년까지 67년동안 다저스 중계를 했다. 67년. 그래서 그는 '다저스의 목소리'로 불린다. 특유의 오프닝과 운율을 절묘하게 운용하는 화법, 다른 해설자 없이 혼자서 경기 상황을 전달하는 원맨 중계가 그를 상징한다. 여전히 단아한 옷차림과 낭랑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시즌에도 중계를 했고, 깁슨의 시구때도 인터뷰를 했다. 1988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깁슨의 끝내기 홈런때, 스컬리는 홈런 타구 이후 깁슨이 3루를 돌때까지 멘트 없이 현장음을 살려주었고, 그 정적 뒤 "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시즌에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In a year that has been so improbable, the impossible has happened!)" 라는 길이 남을 문장을 만들어 냈다. 다저스타디움의 기자실은 2001년부터 빈 스컬리를 기념해 '빈 스컬리 프레스박스'로 이름 붙여졌다.



그리고 한장의 사진이다. 일부러 사진을 작게 하고 한쪽으로 붙였다. 어떤 사무실 입구다. 사진 아래쪽에 회사 이름이 보인다. '오말리 세이들러 파트너스.' 1988년 당시 다저스 구단주였던 오말리 집안의 2세, 피터 오말리가 운영하는 회사다. 피터 오말리는 KBO 초창기에 영향을 미쳤고, 박찬호를 스카우트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1962년부터 다저스에서 일했고 구단주로서 누구보다 큰 영향을 주었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토미 라소다가, 빈 스컬리가 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 2세들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리드하는 구단주 그룹이며, 피터 오말리는 늘 한발짝 뒤에 있는 후견인이다. 그는 1998년 구단을 매각하고 다저스타디움을 떠난 뒤 LA 시내 '피게로아 스트릿'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처음에 16층에 입주했던 그 사무실은 피터 오말리의 간절한 요청에 수년 뒤 19층으로 이사했다. 그가 간절히 원했던 사무실 주소가 사진 왼쪽에 보인다.

1988.

<사진=송진의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