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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Oct 28. 2024

시간의 바깥

한 번도 돌보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정원 

나에게 시간은 항상 채워야 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그냥 놀리거나 내버려 둘 수 없는 것.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어찌 보면 내가 평생 시간을 붙들고 괴롭힌 나머지, 시간이 나 좀 살려달라고 더 이상 채워버리지 못하게 모든 울타리와 테두리를 허물어버린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어떻게'보다는 '어떻게든'에 더 힘을 실어왔는지도 모른다. 채워지지 않은 시간이 주어지면 나는 자꾸 잡념이 생긴다. 그게 싫었다. 가뜩이나 생각으로 가득 차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데 뭘 또 생각해. 그냥 움직이고 말지. 뭐라도 하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어떻게든 가니까 그게 나약한 나를 구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를 더 굴리는 것이 나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아까웠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정말 누구에나 공평한 것이 시간 아닌가. 물론 상대적 시간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길어지지만 절대적, 물리적으로는 맞으니까. 나 스스로 인생에서 뿌듯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대부분 그 시간을 남들보다 훨씬 더 밀도 있게, 알뜰하게 썼던 기억들이다. 영어학원 새벽반을 다니면서 하루종일 공부했던 기억,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알바를 3개씩 하던 기억, 밤새도록 일을 너무너무 열심히 했던 기억. 여행을 다니고 친구들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것들도 좋은 기억들이지만 앞의 기억들처럼 짜릿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각박한 인생을 살았다거나 위로가 필요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다 좋아서 의미 있게 여기고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이 시간을 그저 성실함으로 채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걸로 채워야 이 다음이 보일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자꾸 뭘 내려놓으라고 하고, 비우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었다. 아니 난 뭘 제대로 잡아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데. 내가 가진 건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강한 몸뚱이와 부지런함 밖에 없는데 이걸 안 쓰면 난 뭘 땔감으로 태워서 앞으로 나아간단 말인가. 이런 나의 기조가 그래도 여태 조금은 먹혔던 듯하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시간이 또 나를 탈출해서 떠나려고 할 때, 나는 부지런함으로 그 시간들을 어떻게든 묶어놓고 채워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워진 시간을 견뎌내질 못하는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랬던 시간이 이번에 또 느닷없는 탈주극을 벌이고 있다. 이상하게 예전처럼 붙잡고 싶지가 않다. "너 이리 와."하고 멱살을 잡아다가 차곡차곡 쌓인 닭장처럼 채워놔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럴 의지가 잘 안 생긴다. 관성처럼 붙잡아보는 몇 가지 일들이 있지만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어느 구름에서 비 내릴지 모른다는 말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내가 비를 맞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무용한 것을 배척하고 희미한 가능성의 비구름을 쫓아다니다 내 안의 어떤 것이 '툭-'하고 끊어져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작년부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며 내 인생의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되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도망간 시간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 바깥을 바라보니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된 정원 같다. 경작지로 따지면 단 한 번의 휴식기도 없이 매년 뭔가 만들어내느라 지력이 다한 마른논 같다. 내가 부지런히 채워온 세월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 딴에는 틈틈이 놀고, 하고 싶은 것하고, 즐겼다고 생각했는데 정원 한가운데에 머리숱 많고 흰머리도 많은 마흔 살 불안이가 우두커니 앉아있다. 이 정원은 내가 비료를 더 퍼붓는다고, 물을 많이 준다고 예쁘게 가꿔지는 게 아닌 듯하다. 또 시간, 시간이 필요하다. 땅이 회복하는 시간, 싹을 틔우는 시간, 적당히 솎아주고 옮겨 심어 주는 시간, 예전 같은 멱살잡이로는 해결이 안 되는 흘려보내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제일 못하는 걸 잘 해내야 하는 시간을 마주했다. 터닝 포인트가 될지 무릎이 풀썩 꺾이는 '쪼인트'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결국 해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양재 꽃시장에서 웬만큼 자란 멋진 묘목과 꽃을 들이고 싶지만 내 인생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만만한 상추씨부터 심어보고, 고기 구워 먹을 때 한 번 뜯어서 먹어보고, 그다음 주에 내가 좋아하는 튤립 구근도 사다 심어보고, 근데 알고 보니 구근 아니고 양파여서 인스타 스토리 한 번 올리고, 그러다 대충 던져둔 감나무 씨앗에서 싹이 나서 곶감으로 부자 될 생각도 좀 해보고.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가꿔진 정원을 보고 '원래 이런 게 영국식'이라고 개소리를 할 수 있을 즈음이 되면 나도 무언가 되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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