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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따시와겡끼데스

<러브레터>를 보고 (스포 있음)

by 제일제문소

나는 이미 읽은 책이나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거의 드물다. 내가 여러 번 봤다는 건 정말 너무 좋아서 보고 또 봤다는 거니까. <헤어질 결심>,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정도? 하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전에 본 기억만 있고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때, 보통 재개봉하는 영화들이 그렇다. 어릴 때, 어른들이 보는 영화들을 보고 멋있어 보여서 봤는데 결국 영화의 메시지는 하나도 이해를 못 하고 '이런 멋진 영화를 보는 나'만 챙겨서 나온 그런 것들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좀 웃기지만 그때의 내가 귀여우니까 조금 봐주기로 한다.


대표적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이 그렇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는, 말해봤자 나의 연식만 드러나는 극장들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들을 꽤 많이 챙겨봤다. 심지어 무슨 영화제에서 굳이 예매해서 본 것도 같은데. <릴리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4월 이야기> 이런 영화들을 다 봤다. 하지만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정말 십 대의 나새끼...허세가 정신을 지배한 게 분명하다. 아무튼 그 와중에 그나마 조금은 기억이 남아있던 <러브레터>가 동네 극장에서 재개봉을 한다길래 슬금슬금 다녀왔다.


사실 기억이라고 남아있던 것은 '후지이 이츠키'라는 동명이인 에피소드, 오타루의 엄청난 눈밭(그때는 오타루인지도 몰랐다), 흰 커튼 뒤에서 나타난 어린 남주가 잘생겨서 놀랐던 기억, 그리고 우리 모두 기억하는 '오겡끼데스까'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온갖 쓸데없는 것을 다 기억하고 사는 나에게 이렇게 봤던 영화가 리셋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고 느껴질 만큼 처음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봤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필름 카메라의 질감과 세로자막, 옛날 영화 특유의 촌스러움 같은 것들이 새삼스러워 오히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나카야마 미호 1인 2역인 것도 나는 다시 보면서 깨달았다.


그때의 귀여운 나는 이제 없지만, 오타루 텐구야마 전망대에 올라 '오겡끼데스까'를 외쳐본 나,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읽을 수 있게 된 나, 서브 남주가 부르는 노래가 <푸른 산호초>라는 것을 아는 나, 나이가 들수록 삶이 주는 메시지가 무거워 오히려 영화로 도망가게 되는 나, 막상 일본에서는 <러브레터>가 별로 인기가 없었다는 걸 아는 내가 켜켜이 쌓였다. 내가 본 건 아마 30년 전 최초 개봉이 아닌 25년 전 재개봉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뭔가 좀 세월이 흘렀다 하면 10년, 20년이라 애써 외면했던 나의 나이를 좀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25년이라고 뚝 잘라놓으니까 너무 순식간 같지만 그 사이 나에게 '겡끼'했던, '겡끼'하지 못했던 숱한 시간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일본의 여러 곳을 가봤지만 자꾸 삿포로, 오타루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이런 뜨끈한 마음에 차가운 눈이 내려앉아 좀 미지근해지길 바라서가 아닐까. 작년 3월 오타루 여행을 갔을 때, 눈보라가 몰아쳐 빙판길을 종종걸음으로 다녔어도 모든 것이 눈으로 덮여 고르게 하얀 풍경이 참 좋았다. 못생긴 것들을 잠깐은 덮어주니까 못생긴 마음도 괜히 사그라드는 것 같고 '겡끼'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이 오면 그 뒷일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보지도 않을 사진들을 찍어대는 게 아닌가 싶다. 덮고 잊고, 괜찮아지고 싶은 마음으로.


+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나카야마 미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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