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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 아노라

영화 <아노라>를 보고(스포 있음)

by 제일제문소

제목은 '아노라', 컬러풀한 포스터와 흑발의 여주인공을 보고 이건 발리우드 영화인가 했다. 역시 시네필들의 취향은 다양하군 하는 마음으로 내 취향이 아니겠거니 하고 유심히 보지 않았다. 근데 생각보다 극장에 꽤 오래 걸려있고 명징직조 이동진 선생이 자주 언급을 하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2025년 상반기 미남 이준혁이 장도연의 <살롱드립>에 나와서 션 베이커 영화 얘기를 하며 <아노라>를 언급, 아트나인의 상영시간표를 뒤적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굵직한 영화제 기간 한정 간헐적 시네필인 나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다수 후보? 참을 수 없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지도 않았고 내용도 모르지만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봐서 션 베이커 감독도 뭔가 본인만의 독특한 관점이나 색깔이 있는 감독일 거라는 상상은 했다. 그리고 쨍하니 예쁜 포스터와 다르게 내용은 좀 서글프다는 평도 얼핏 기억이 난다. 딱 그 정도의 배경만 가지고 영화를 봤다. <아노라>는 3개의 영화를 한꺼번에 본 느낌이다. 감독이 자꾸 관객들을 돌려세운다. 한참 따라가다 보면 "선생님, 이쪽이에요!"하고 보는 방향을 바꾸어대서 그렇다. 유튜브 댓글들을 보니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뽑아놓은 예고편에 대한 욕이 많은데 이해가 간다.


하지만 배급사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어떤 장면을 붙이면 신데렐라 스토리, 어떤 장면을 붙이면 로드무비, 어떤 장면을 붙이면 이민자영화...에라이 이럴 바에야 초장에 제일 센 걸로 붙이자 하는 마음 아니었을까. 영화는 속도감도 좋고, 낄낄포인트도 있다. 엔딩은 짧지만 말문을 막히게 한다. 신데렐라 스토리 따위는 없다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어서 그렇다. 아노라가 이고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주려다 울어버리는 그 장면을 3개의 영화 중 마지막 편이라고 했을 때, 그 엔딩 장면은 차창 밖으로 쌓이는 눈처럼 앞 2편의 요란함을 다 잊게 만든다.


너무 짧고 진짜 엔딩신이라 긴 호흡으로 이해할 겨를도 없는 장면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아노라는 염치 있는 사람이라 좋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몸을 팔아 돈을 벌든, 러시아 재벌 만나서 팔자 고쳐보려고 했든, 아노라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 건 없지 않나. 그건 이고르도 마찬가지였고. 매력 있는 사람이었고, 꿈꿔봤고, 시도해 봤고, 실패했고, 그게 전부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둘 다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삶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러니 결국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고르 같은 사람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인생을 수직적인 구조로 보면 아노라는 바닥에서 정점에 올랐다 다시 떨어진 거지만, 하나의 길로 본다면 잠깐 자빠졌고 손 털고 가던 길 다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아노라가 하는 노동의 형태에 대해서도 불편함은 있지만 일단 여기서 굳이 다루진 않겠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상업영화스럽게 달콤함을 잔뜩 풀면서도 자꾸 씹다 보면 쓴 맛이 나 '어우, 이거 맞아?' 하는 생각이 자꾸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맛이 좋고,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한 운전을 능숙하게 잘한다. 나도 어떤 영화를 볼 때 그 안에 숨겨진 많은 컨텍스트와 의미를 읽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노라>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굳이 많은 리뷰를 들춰보지 않았다. 대단한 반전을 담아 놀라게 되는 엔딩도 있지만, '하, 너 진짜...' 하게 되는 엔딩이라 아직 타자화(?)가 잘 되지 않는다. 나와 영화의 거리가 좀 있어야 이 콘텐츠를 '남일'처럼 해석하게 되는데 시간이 좀 걸리려나보다.


<아노라>와 마찬가지로 아직 타자화 되지 않은 <서브스턴스>의 데미무어 언니의 승승장구를 내심 바라고 있는 상황이라 간헐적 시네필의 마음이 어렵지만 극장의 위기라고 난리부르스를 춰도 이렇게 좋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 건 정말 고무적인 일인 것 같다. 모두가 죽는 소리를 하는 가운데도 누군가는 계속 자기의 방식대로 일을 하고 있고, 마스터피스는 나온다. 자, 다들 맡은 일을 잘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자. 인간의 존엄은 거기서 나온다.


+ 누가 나에게 취미를 물어봤을 때 '영화 보는 것'이라고 대답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책 보는 거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정도? 시네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취미가 영화라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굳이 나갈 일도 없는데 <아노라>를 예매해서 극장에 가는 것을 보며 '이 정도 열정이면 영화 보는 게 취미라고 해도 되겠는데'하다가도 '그렇게 따지면 집에서는 거의 영화를 안 보는데?'하고 두 생각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상영관 조명이 꺼지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극장에서 혼자 핸드폰 꺼놓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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