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강아지, 애교복숭아 등등으로 불리우는 남자
어제 자기 전, 남편이 한국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넷플릭스에 있던 ‘새콤달콤’이라는 1시간 40분짜리 영화를 봤다. 보다 보니 완전 극사실주의적인 20대의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의 환승 연애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내 옆에 누워있던 똥강아지는 영화에서 치자면, 뚱뚱하고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여자 주인공 다은을 여왕처럼 떠받들여 주는 혁이 오빠같은 남자랄까. 아 물론, 뚱뚱하지도, 못 생기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별개로, 싱가포르에서 엊그제 간단한 수술을 했다. 그래도 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이라 그런지 괜히 긴장이 됐다. 혹시 못 깨어나면, 이대로 죽게 되면 아쉬울 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쳤는데 우습게도 그 순간, 아 드디어 일 그만하고 편하게 쉴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뭔가 시작 점이 다른 사람과 다를 때는 목숨을 걸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그 다음 레벨로 갈 수 있다는 걸, 그건 해본 사람만 알 것이다. 물론 이 나이까지 살아보고 여기까지 와보니, 인생을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살 필요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죽기 전에 돌아보니 인생에서 노력 없이 유일하게 얻은 보상이 하나는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의 첫 직장에서, 나는 현지 채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 같은 건 거의 없이 바로 현업에 투입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첫 사무직이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실에 앉아 엑셀과 씨름하는 재무 기획 일은 나에게 너무 생소했다.
내가 뭘 잘못한지도 모른 채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아침마다 중국인 팀장님이 주변 사람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혼내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일상은 기획 업무의 한 사이클이 도는 1년 내내 반복됐다.
그 당시에는 나를 좀 봐주거나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견디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라 네이버에서 알음알음 검색하면서 팀장님이 만든 엑셀 모델의 수식을 하나씩 공부해 나갔다.
동시에 너무 많은 부장님들에게 앵벌이하듯 숫자를 취합하고 받는 일을 했는데, 핏덩이처럼 어린 20대 여자 직원은 늘 화풀이의 대상이 되곤 했다. 조직에서 가장 힘없고,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감정 쓰레기통 같았달까. 그 시기를 지나는 동안 내 자존감은 짓밟히는 것을 넘어서, 더 글로리의 문동은처럼 서슬퍼런 복수의 마음이 들끓기 시작했다. 사람이 적당히 괴롭힘을 받으면 몰라도, 그렇게까지 몰리면 이상하게도 버티게 된다. 죽기 살기로.
그렇게 나는 이 구역의 미친년처럼 일을 했고, 그 누구도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아주 많이 잘하게 됐다. 그리고 오랜 시간 박봉으로, 무려 6년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다가 한꺼번에 보상받는 퀀텀 점프를 해서 여기까지 오긴 했다.
그 증명의 과정을 만든 건, 견딜 수 없이 내 안에 쌓였던 한과 억울함이었다.
그런데 남들이 보기엔 빛나는 커리어를 가진 지금까지도, 내 안엔 여전히 그 한을 어딘가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누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뾰족한 나에게 남편은 늘 내가 어떤 처절한 노력 없이도 요구하지 않아도 넘치도록 충분히 사랑을 퍼부어 주는 사람이었다.
짝꿍은 수술이 끝나고 집에 와서 열심히 수제 생강차를 끓이고, 꼭 다 마셔야 된다며 한사발이나 큰 잔에 부어 주었다. 나는 그 달지 않은 생강차를 홀짝이며, 왜 수술 직전에 떠오른 인생의 유일한 보상이 남편이었는지 알았다.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건 내가 잘나서 받았던 어떤 결과가 아니라,
내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던 순간에도 건네받았던 다정함 같은 거라는 걸.
나는 달지 않은 생강차를 끝까지 다 마시고, 부엌에서 또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만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아, 나는 사실 그냥 이런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였지 싶었다.
그냥 마트에서 몇 천원짜리 생강을 사 와 매일 정성껏 끓여주는 생강차 같은 거.
누가 보면 너무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그런 거.
이 나이에도, 정말 나이브하고 순진하게
나는 여전히 돈보다 그런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인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그렇게 미친 듯이 일을 하고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돈 말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여자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