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주는 어른들

지금 이 순간, 맘껏 표현하고 사랑할 것

by 김승우

2019년도에 방영했던 KBS2 108부작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엄마인 박선자(김해숙)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혼자 걷는 장면, 강변에 혼자 앉아있는 장면, 매해 하던 김장을 못하겠다며 달력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 등, 그 중에서 나는 살 날이 별로 남지 않아 가족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김장을 하는 모습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큰 딸 강미선(유선)이 남해에서 올라오자마자 피곤하고 짜증이 난 상태에서 왜 꼭 오늘 김장을 해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할 때, 그 얘기를 듣고 딸들을 보고 또 복잡한 심정에 혼자 오열하는 엄마를 보았을 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엄마를 떠나 보내고 나서 강미선의 후회스러울 마음이 전해져 장면이 한참 지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근데 또 이런 기분, 이런 감정 참 찰나의 순간이다. 뭐가 이렇게 항상 바쁠까, 뭐가 그렇게 항상 심각하고 잘나서 살다 보면 자꾸 잊는다. 내가 아는 게 많아지고 얻을수록, 부모님은 점점 작아지고 잃고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는 불효녀들이라고 박선자의 딸들을 비난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사실은 나도 세 딸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을.

<당신이라는 자랑>에서, 박근호 작가는 부모님의 희생으로 우린 조금 더 안정적인 삶이 되어가는 만큼 부모님은 반대로 점점 많은 것을 잃어가시며 그 과정 속에서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자식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 문구를 읽자마자 엄마가 예전에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 사용법에 대해 물었을 때,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불친절하게 대답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연이어 떠오른, tvN <나빌레라>의 엄마 해남(나문희)의 대사, 울면서 들었던 그 대사,

"왜 자식이 번듯하게 잘 사는 걸로 부모가 자식 앞에서 작아져야 하니? 왜 너 잘 자라준 걸로 아버지가 네 눈치를 봐야 하냐고"

부모님의 희생으로 우린 이렇게 똑똑하고 잘나졌는데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이기적이고 교만하게도, 우린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그 희생에 상처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난다면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지금 이 생활, 익숙하고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 일상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미루고 방치한다. 내가 방치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결국, 쌓이고 쌓여 커다란 후회가 되어 나를 짓누르겠지, 세 딸이 엄마의 폐암 말기 사실을 알고 뼈저리게 후회했던 것처럼.

2012년쯤이었던 것 같다, 친할머니를 사촌 언니 결혼식에서 뵙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 기억에 멍하니 한곳만 응시하고 계셨었는데 그때 어쩌면 할머니는 마지막임을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시간이 한참 지나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할머니랑 오늘 대화도 못했는데 다음에 뵐 때 안아드려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다음으로 할머니를 찾아 뵈었을 땐 할머니가 이미 혼수상태에서 눈도 뜨지 못한 채 누워계셨다. 몇 년간 그 상태로 버티시다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눈을 한 번도 뜨지 않으신 채로 아주 버겁게 모든 걸 내려놓으셨다. 모든 게 멈춰버린 할머니의 얼굴과 손을 내 손으로 포갤 때의 그 차가움과 딱딱함은 아직 나에게 생생히 남아있다.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고, 배움을 충분히 겪지 못한 할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미리 보셨고, 내게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출근하다가, 퇴근하다가, 쉬는 시간에, 문득문득 할머니와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점에 마음이 쓰라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부족하고 미성숙한 나는 오늘도 다짐을 열심히 한다. 영원히 나의 편인, 나를 지켜주는 어른들에게 더 많이 표현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할 것을, 더 많이 안아주고, 더 자주 안부를 여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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