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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May 06. 2022

내가 이제 와 '물경력'을 의심하게 된 이유

수퍼바이저의 정체란 무엇이냐말이다



흔히들 '물경력'이라는 표현을 쓴다. 말 그대로 경력의 형태나 그 성질이 물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다. 통상적으로는 난이도가 낮고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업무 포지션이 다수이기 마련. 그러니 당연히 전문성을 인정받기도 어렵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문 영역을 특정하기 애매한' 경우도 포함될 수 있어 생각보다 많은 경력자들이 한 번쯤은 고민하게 되는 주제다. 아마도 그건 세상엔 소위 말하는 전문직 외에도,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업직종의 근로자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별안간 물경력이라는 말의 정의를 곱씹게 된 건, 불과 한 달 전부터의 일이었다. 나의 재취업 준비 과정에서 느낀 '애매한 전문성' 혹은 '한계점'에 대한 의구심이 그 이유였다.




어느덧 안식년 7개월 차. 나는 최근 '습관성 구직'을 다시 시작했다. 습관성 구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그저 습관화된 행위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일종의 관성처럼, 어느덧 나의 대뇌와 오른손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구직사이트를 찾고 있었다. 이래서 학습이 무섭고, 습관이 무섭다. 하기는 싫지만 내 소중한 하루 일과에 습관성 구직이 끼어들어가는 걸 굳이 허용한 이유는, 오직 하나. 언젠간 다시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걸 내 본능이, 습관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여하튼 나는 '습관성 구직' 덕분에 이번 달에만 총 3번의 면접을 치렀다. 본의 아니게 이직의 경험이 많은 나는, 면접 성공률이 꽤 높은 편이었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말이다. 어느덧 8년 차 경력직임에도 불구하고, 면접은 커녕 서류 합격 자체가 쉽지 않음을 아주 쉽게 깨닫게 됐다. 코시국은 채용 시장의 판을 크게 흔들어 놓았고, 견고하다 믿었던 8년 여의 경력은 힘을 잃었다.


그러던 중 나의 재취업 전선에서 이전과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면접의 내용과 방향성이다. 정확히는 면접관들의 비슷한 질문 방식에 있었다. 그것들은 그간 쌓아 온 나의 경력과 전문성에 큰 의구심을 갖게 했고, 약간의 허무감마저 안겼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이다.



면접 1#

면접관 : "저는 여성분이 영업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경쟁사도 마찬가지구요. 이전 경력은 모두 좋으신데... 괜찮으시겠어요?"

여자라서 그렇게 걱정이면, 대체 뭐하러 이 먼 데까지 나를 오라고 한 걸까. 나까지 걱정되게 만드네. 그러면 나는 뭐 일 하고 싶겠어요? 참고로 난 영업팀 소속의 퍼바이저이자 영업 담당 출신이다.


면접 2#

면접관 1 : "지금까지 여성분을 저희 팀원으로 둔 적이 없는데. 그래서 고민이네요. 혹시 발주나 정산도 업무에 포함될 수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면접관 2 : 영업(관리)이면서 퍼바이저도 하시고. 좋게 말하면 멀티플레이어지만, 나쁘게 말하면 애매한 경력일 수 있어요. 영업인지 영업지원인지 헷갈리거든요. 솔직히 그래서 굉장히 고민이 됩니다."

직영점 영업의 전반을 퍼바이징 해 왔던 나. 그런 내가 애매한 경력일 수 있다는 말은 꽤나 신선했다. 매출 증대와 신규 출점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던 숱한 세월. 업계 또는 회사마다 직무의 내용과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경력기술서 상의 상세 업무와 현재 면접 중인 직무의 JD가 상당 부분 일치하는 상황에서, 왜 나는 이런 이야기를 굳이 들어야 하는 걸까. 솔직히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기분은 꽤 별로였고.


면접 3#

면접관 : "혹시, 월 마감 정산하는 업무에 지원해 주신 것 맞죠?" (영업직을 지원했다고 답했다.) 아.. 그렇죠? 인사팀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영업 지원 파트' 지원자라고 전달받았거든요. 경력 사항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여쭤 봤어요. 그럼 영업 관리로 이해하고 면접 진행하겠습니다."

참나. 이젠 영업 지원이란다. 영업 관리와 영업 지원의 업무는 엄밀히 다를진대. 그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일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면접의 내용은 좋았다. 이직 '짬밥'은 괜히 배불리 먹어 온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 회사에도 여성 영업 관리 인력은 없었다. , 여자라서 놀랐던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성으로부터 출발했다.



놀랍게도 나의 경력은 영업 관리와 영업 지원의 경계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동안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 왔던 건가.


일반적으로 수퍼바이저는 가맹점 영업 관리 포지션을 말하지만, 나는 직영점을 관리해 왔다. 또한, 외식 업계가 아닌 리테일 업계가 내 주된 무대였다. 지역 장부터 본사 영업 담당자를 아우르는 직무였던 것이다.


마치 MD가 '뭐든지 다한다'라는 의미와도 같다는 우스개 말처럼, 퍼바이저 역시도 외식 또는 리테일 업계에서 현장과 본사를 잇는 '전방위적인 업무'를 진행한다. 그랬던 나도 '여자라서, 경력이 애매해서, 그리고 (가장 어이가 없지만) 직전 급여가 높아서 등의 이유'나의 진짜 경력이 아닌 회사 또는 사회가 원하는 방향의 포지션으로 권유받는 모양세가 되었다. 이쯤 되니 '경력 걸걸한 30대 미혼 여성'이기 때문에 '언제 경력 단절될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많은 돈을 주기는 더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비뚤어진 마음도 샘솟았다. 내가 오바하는 걸까. 그저 합리적인 의심만 들뿐. 면접장을 나오면서는 야릇한 현타를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아직은 이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다. 지독한 셀프 보상 심리인 것도 사실은 맞다. 나 아니면 누가 나를 쉬게 하나. 지금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다.


정신없이 내달렸던 지난 시간을 가만히 곱씹고, 앞으로를 새롭게 대비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지금의 이 쉼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난 얼마나 더 값지게 견고히 쉴 수 있는 지를 매일 같이 치열히 고민한다.


아마 나는 당분간 구직 사이트를 계속 찾게 될 것이다. 당분간이 아니라 재취업이 결정될 시점까지가 맞겠다. 나에게 제격인 일자리가 있다면 언제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지나치게 잘 알고 있어 괴로울 지경.


근데, 안식년은 1년이 국룰 아닌가?


쉬고 있어도 쉬고 싶은 퇴사 7개월 차의 시간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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