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늘어날수록 나는 왜 줄어드는가

‘괜찮아’가 선을 지우는 방식

by 핑크 바게트

‘기준’과 ‘전문성’이 존중받는 이곳에서, 나는 다짐했다.

이번에는 나를 헌신의 늪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오픈 첫날, 짧은 브리핑이 있었다.

바리스타, 베이커, 홀 매니저. 각자의 역할이 불렸다.

내 차례였다.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명찰을 건넸다.


“우리 팀의 새로운 슈퍼바이저야. 잘 부탁해.”


처음 듣는 직함이었다. 내가 메시지로 확인받은 직함은 ‘메인 바리스타’였다.

손바닥에 놓인 명찰과 가슴 안쪽의 문장이 서로 다른 이름을 말했다.

기쁜 마음은 짧았고, 곧이어 환영의 박수 속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던 것 같다.


그날은 바빴다. 주문표가 끊이지 않았고, 스팀 소리가 공기 결을 자주 바꾸었다.

내가 좋아하는 집중의 시간이 길게 이어졌지만, 그 사이사이에 다른 문장들이 끼어들었다.


“이건 슈퍼바이저가 처리하는 거라던데요.”

“재고가 비는데, 발주는 제가 하는 건가요?”

“다음 주 스케줄 변경은 어디에 말씀드려요?”


사람들은 나를 ‘슈퍼바이저’의 역할로 불렀다.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서 있으면서도, 발주 표와 엑셀 시트, 신입 교육 메모를 동시에 떠올려야 했다.


명찰은 한 줄이었고, 업무는 빈칸이 많았다.

직함은 있었지만 인수인계와 기준 문서가 없었다.
누가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언제까지 맡는지 합의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 직함은 기쁨보다 과제에 가까웠다.
나는 우선 바를 돌리고, 절차를 채우는 일을 내 몫으로 적어 두었다.


점심 무렵, 매니저가 다가왔다.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빠르다.


“미안하지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 오너가 시킨 일이 있는데 급하대. 30분 안에 돌아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요라고 말할 근거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사과와 양해, 공적인 이유, 시간제한'


그 모든 조합은 나의 거절을 미리 소거하는 문장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지금 남아 있어도 되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남아 달라고 말하는 일은, 두 사람을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일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습관처럼 돌아갔다.

머신을 잡고, 샷을 뽑고, 우유의 결을 맞추고, 주문표를 넘겼다.

영수증 롤이 빠르게 풀려 나가는 동안, 바는 한 사람의 속도로만 돌았다.


퇴근 후, 집에서 노트를 폈다. 전날의 기록이 깔끔하게 누워 있었다.


오늘 배운 기준: 왜 이 순서로 프렙을 하는가
내가 더한 것: 오픈 전 샷 타임 산포 기록 방식
내일 시도할 것: 로스팅별 드립 커피 세팅


종이를 바라보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내가 다듬고 싶었던 진짜 일들이었다.

오늘의 나는 기준을 다듬기보다, 경계를 잃지 않는 데 더 많은 힘을 썼다.

이름표와 역할 사이의 간격은 짧았고, 그 짧음은 자주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도 비슷했다.

“슈퍼바이저면…”으로 시작하는 부탁들이 예의 바르게 쌓였다.

내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빈칸이 사람 쪽으로 미끄러지는 방식이었다.

누군가의 ‘잠깐만’은 대체로 ‘지금 당장’이었고, ‘도와줘’는 흔히 ‘네 일’이 되었다.


나는 그 문장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래된 장소에서 이미 배웠던 문장.


다만 이번에는 그 문장을 인지한 채로, 쉽사리 끄덕이는 나를 보았다.

나는 메모의 언어를 바꾸기로 했다. 감정 대신 절차, 호의 대신 합의. 노트의 다음 장에 짧게 적었다.


역할 정의: 명칭과 범위, 의사결정 권한
보상 매칭: 책임 증가 시 수당/시간 조정
우선순위: 발주·교육·바 운영의 동시 충돌 시 기준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조용해졌다.

누군가를 탓하는 대신, 문장을 세우는 일.

‘괜찮아’를 누르기 전에 먼저 확인할 사항들.

거절이 아니라, 역할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말들.


창문 밖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나는 그 바람을 한 번 쐬고, 불을 껐다.

오늘의 결론은 간단했다.

아직 늪은 아니다. 다만 가장자리다.


내일은 이 가장자리에서부터 말을 시작해 보자.

이름표와 역할이 같은 자리에 놓이도록.

다음 장의 제목이 머릿속에 선명해졌다.

경계의 문장.

그 문장으로, 나는 문턱을 넘어가 보려 한다.

가장 좋아하던 라떼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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