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해야만 지켜지는 것들
아프고 나서
가장 어려워진 건
몸이 아니라
‘거절’이었다.
몸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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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 부모님이나
친정엄마가 아프실 때도 그렇다.
직접 간호를 해드리지는 못하고
요양사를 불러드리는 쪽을 택한다.
나도
딸이고 며느리인데,
곁에 있어드리지 못하는 선택이
늘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내 몸이 무너져버리면
그다음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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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부득이하게 강아지를 맡아달라 했을 때,
조카들을 봐달라 했을 때도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그 일이 끝난 뒤의 몸 상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이해해.”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 뒤에 남는
섭섭함이 느껴질 때
나는 혼자서 오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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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모임도 그렇다.
번번이 거절하다 보면
“뭐 섭섭한 거 있어?”
“왜 자꾸 안 나와?”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
설명해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조심하는지
완전히 이해받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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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으로 놀러 오겠다는
지인들의 말도
나는 자주 말린다.
신혼 초에는
우리 집이 늘 북적였다.
그때는
아직 궤양성대장염이 생기기 전이라
지인들이 우리 집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도
나는 즐거운 쪽에 가까웠다.
친구들, 회사 동료들,
가족들까지.
어느 날은
친구 남편마저
우리 집 숟가락과 그릇 위치를
알아서 꺼내 쓰는 걸 보며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를
그만큼 편하게 생각해 주는 게
고마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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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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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잘해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프고 나서
나는 알게 되었다.
모두에게 잘해주느라
정작 나를 잃는 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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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보다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이기적으로 만들기보다
오히려
더 오래, 더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