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았다면 몰랐을 삶 – 5

아프고 나서야 배운, 사는 법

by 분홍야옹이

아프고 나서

삶이 갑자기 거창하게 달라진 건 아니다.


나는 아프기 전부터 하던 일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일을 더 만들지는 않고,

원래 맡아오던 일의 범위 안에서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남편과 아들들 챙기고,

재택으로 남편 회사 사무 일을 조금 돕고,

원룸 관리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전화받고,

서류 보내고,

월세 입금 확인하고…

그저 예전부터 해오던 일들이다.


다만,

그 이상을 더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이런 일들을

미루거나 줄인 건 아니다.

우리 가족의 일은 그대로 하되,

가족 이외의 일만 조심스럽게 거절하고 있다.



예전의 나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일정을 맞췄고

사람을 만났고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몸이 먼저다.


아프면

약속을 미루고,

쉰다.


그게

무책임해 보일까 봐

걱정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안다.


몸을 무시한 성실함은

결국

누군가에게도

좋지 않다는 걸.



병은

내게

‘포기’를 가르쳐줬다기보다

‘선택’을 가르쳐줬다.


모든 걸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무엇을 할지

더 분명해졌다.



나는 이제

아픈 날을

‘망한 하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픈 날은

그저

‘조심해야 하는 하루’ 일뿐이다.


그래도

차를 마시고,

글을 쓰고,

웃고,

살아낸다.


조심스럽게.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천천히

나를 살피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병을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서

내가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늘도

나는

몸이 허락하는 만큼

삶을 산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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