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나서야 배운, 사는 법
아프고 나서
삶이 갑자기 거창하게 달라진 건 아니다.
나는 아프기 전부터 하던 일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일을 더 만들지는 않고,
원래 맡아오던 일의 범위 안에서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남편과 아들들 챙기고,
재택으로 남편 회사 사무 일을 조금 돕고,
원룸 관리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전화받고,
서류 보내고,
월세 입금 확인하고…
그저 예전부터 해오던 일들이다.
다만,
그 이상을 더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이런 일들을
미루거나 줄인 건 아니다.
우리 가족의 일은 그대로 하되,
가족 이외의 일만 조심스럽게 거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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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나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일정을 맞췄고
사람을 만났고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몸이 먼저다.
아프면
약속을 미루고,
쉰다.
그게
무책임해 보일까 봐
걱정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안다.
몸을 무시한 성실함은
결국
누군가에게도
좋지 않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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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내게
‘포기’를 가르쳐줬다기보다
‘선택’을 가르쳐줬다.
모든 걸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무엇을 할지
더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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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아픈 날을
‘망한 하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픈 날은
그저
‘조심해야 하는 하루’ 일뿐이다.
그래도
차를 마시고,
글을 쓰고,
웃고,
살아낸다.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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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천천히
나를 살피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병을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서
내가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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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몸이 허락하는 만큼
삶을 산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