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늘 조심스러웠을까
나는 원래
잘 참는 사람이었다.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게
괜히 관심 끌려는 것 같고,
연약해 보이는 것도 싫어서
괜찮은 척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버티고, 넘기고, 참았다.
그러다 궤양성대장염이 악화되면
완치가 안 되는 병이라
늘 아프긴 하지만,
그나마 살 만한 상태로 돌아오기 위해
일주일은
먹는 것과 쉬는 것에만 집중하며
몸을 위해
‘나대지 말아야’ 했다.
자유롭지 않게,
오로지 몸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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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참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살았다.
두 분은 작은 공장을 하셨고
엄마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공장을 오가며
일을 도왔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나는 할머니댁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그 선택은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
그 시절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부모님과 동생들이 사는 집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가족 속으로
‘돌아온 아이’라기보다
‘늦게 합류한 아이’ 같았다.
이미 짜인 퍼즐 속에
조심스럽게 끼워 맞춰진 조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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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을 바랐던 엄마의
첫째 딸이었다.
엄마는
외동아들인 아빠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바랐고,
그건 그 시절엔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딸과 아들을
구분 없이 키웠다.
나는
차별받으며 자라지 않았다.
내가 조심스러웠고
눈치가 빨랐고
체면을 의식하게 된 건
그 때문이라기보다
환경과 성향이 만든
나만의 생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성향도
그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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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 댁은
집이면서 동시에 공장이었다.
일하는 사람도 많았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도 늘 있었고
늘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나’를 의식하게 됐다.
그래서였을까.
화장실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대변을 참았다.
가족이어도,
낯선 사람이어도
누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기다렸다.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모습이
‘보이는 나’에 포함되는 게 싫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규칙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가끔
그 습관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생각한다.
확실한 원인은 모르지만
내 몸은 분명
오래 참아온 것들을
이제는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참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 몸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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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 시절의 어른들이
나에게 못 해줬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나와
내 아들들과의 관계와 비교하면
오히려
너무 잘해주셨던 분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완전히 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아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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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늘 관심을 많이 받았고
어린 시절
돈 걱정 없이
좋은 건 다 먹고
좋은 건 다 입고
갖고 싶은 것도
웬만하면 가질 수 있었다.
부족함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정말로 필요했던 건
조금 달랐다.
더 많은 것보다
좀 더 조용하고
좀 더 안정적인 가정이었다.
매일 같은 얼굴로 돌아오는 사람,
아무 말 없이 있어도 편한 공간,
그런 것들이
내겐 더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안정’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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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몸의 상태를 봐가며
활동의 강약과 속도를 조절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서른다섯부터
그 조절을 시작하게 됐다.
지병이 생긴 덕분에
조심하게 되었고,
불편해졌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관리’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이
내 삶의 리듬을
앞당겨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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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나를 몰랐을 것이다.
왜 이렇게
자주 참고,
조심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덜 아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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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내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솔직하게
살아가려 한다.
덜 참는 쪽으로,
조금 더 편한 쪽으로.
그게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