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커리어 인맥 제로에서 시작하는 취준 생활
어릴 때는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몰랐다. 싱글맘이었던 엄마는 어린이에게 돈타령을 하며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가난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 15평짜리 임대아파트를 전전하면서도 수도에,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커가면서 알았다. 나는 부모로부터 받을 게 하나도 없다. 단 땡전 한 푼 없다. 다만 물려받을 빚도 없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에서 혼자 시작하는 거다. 오히려 그게 나를 자유롭게 했다.
엄마는 내가 당신을 버려두고 머나먼 타지 땅으로 날아가겠다는 선언에 눈물을 보였으나 나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주변에 같은 선택을 하고 싶었으나 부모에게 유산으로 협박당하고 일가친척들의 눈치 및 각종 가족사로 인해 포기한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협박당할 미래 물려받을 유산도, 나에게 허튼소리 할 친척 한 명 없이 훌훌 자유로운 몸이 되어 캐나다로 날아왔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열심히 일해서 모은 전재산 천만 원을 들고.
이십 대 초반인 나에게 천만 원은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큰 돈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그런 큰 단위의 돈을 만지거나 써 볼일도 없었다. 그 큰돈을 들고 캐나다에 방금 도착했으니 한 달간은 좀 여유롭게 쉬면서 돌아다니고 일은 나중에 구하고 싶었다.
처음 며칠은 열심히 다운타운도 구경 다니고 필요한 생필품 쇼핑도 했다. 남들 다 일하고 학교 가는 평일 낮에 박물관에 가서 여유롭게 전시를 감상하고 브런치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정말 좋았다. 평소에 외근을 나가러 오후 2시에 밖에 나오면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있거나 같이 지하철에 타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니 정말 좋았다. 딱 2주 차까지는.
스무 살이 된 후로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 없는 흙수저 본능이 불안감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일 구하는 게 계속 늦어지면 어떡하지? 돈이 똑 떨어져서 집세도 못 내고 길에 나앉게 되면 어떡하지? 한국에서부터 어떤 안정성도 없이 당장 벌이가 끊기면 미래가 없는 삶에 길들여진 덕에, 결국 여유를 즐길 기회가 주어져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도착 2주 만에 레쥬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들고 온 노트북을 챙겨 들고 밖에 나가 낮에는 공원을 산책하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이력서를 열심히 썼다.
나는 한국에서 프로듀서였다. 캐나다에서도 전공을 살릴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나는 이미 방송일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편집기 화면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아 골이 지끈거릴 지경이기에 일을 그만두고 그냥 젊은 나이 하나 밑천 삼아 캐나다로 떠나온 거였는데.
그래도 당연히 아무 생각도 없이 온건 아니었고, 그나마 출국 직전 '워홀'하면 막연히 떠올리는 카페 잡을 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국에서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바리스타 코스도 끝내고 왔었다. 하지만 막상 이력서를 넣기 위해 인디드를 켜자, 눈에 들어오는 건 각종 영상 관련 직렬들이었다. 우선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스타벅스부터 부동산까지 전부 이력서를 먼저 온라인으로 보냈다. 보통 워홀러들 사이에서는 카페나 레스토랑도 돌아다니면서 직접 레쥬메를 드롭하는 게 국룰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걸 시도하기도 전에 온라인으로 넣은 곳들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면접을 봤다.
최종 오퍼를 받은 곳은 한인 사업장 두 곳과 캐나다 현지 사업장 한 군데였다. 캐나다에서의 학력이나 이렇다 할 경력이 없으니 큰 캐나다 방송국 같은 곳은 애초에 이력서를 넣지 않고 일단은 경력을 쌓을 생각으로 영상 직렬을 구하는 한인 사업장들에 먼저 연락을 했었다. 면접까지 이어진 한인 사업장은 두 곳 다 사장부터 직원까지 전부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사무실이었다.
나에게 오퍼를 준 첫 번째 회사와의 면접 날. 입구에서부터 정리 안 된 각종 사무 집기들과 면접시간이 됐는데도 자리에 없는 사장과 면접자 앞에서도 서로 야 야 불러대는 직원들까지. 정식으로 방송국에 들어가기 전에 한 달간 일했던, 끝까지 근로계약서조차 써주지 않은 블랙기업의 향수가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나름 대기업만 거쳐가며 일했는데 캐나다에 오면 다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구나, 가 절절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면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단순히 영상 마케터 포지션을 구하는데 실제 방송국 이력을 지닌 사람이 오자 지나치게 오버스펙인 내 이력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고, 일 자체는 어느 정도 익숙하겠지만 연봉을 한국보다 많이 깎아서 들어 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고급인력인지를 알고 있으므로 대답을 보류했다.
두 번째로 면접을 본 곳은 캐나다 내에서 규모가 있다고 하는 업장이었는데, 사장이 면접 때부터 굉장히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이미 '본인 직종 말고 이것저것 다른 잡무도 하면서 배울 기회를 주겠다'느니 하는 전형적인 한국형 블랙기업 같은 소리를 내뱉어댔다. 나더러 무거운걸 잘 옮기냐고 물어보며 정말 ‘각종 잡무’에 넣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고 내가 저런 사람들 피해서 캐나다로 온 거였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곳은 한국에서 했던 일과 전혀 상관없고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엔트리 레벨 직종이었다. 막 동아시아권으로 사업을 확장한 참이라 바이링구얼을 간절히 찾고 있는 이 캐나다 사업장은, 업무는 본인들이 다 알려주겠다며 파격적인 임금과 복지조건을 제시했다. 해본 적 없는 직종이라 겁이 났고 무엇보다 내가 영어로 일상회화는 자유롭게 하지만 비즈니스 영어도 가능할지 두려웠다.
세 가지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 나는 고민했다. 당장 한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원래 했던 익숙한 직무를 한다는 유혹적인 선택지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내가 캐나다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기억해야 했다. 한국어로 의사소통하며 하던 일을 하고 싶었으면 애초에 한국을 떠나 외국인 신분으로 타지에 올 이유가 없었다. 나는 새로운 조직문화를 체험하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캐나다 회사는 내가 해본 적 없는 직무와 비즈니스 영어를 해야된다는 부담도 컸다. 기껏 입사했더니 내가 그 포지션에 맞지 않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그들이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해 포지션을 주었으니, 만약 내가 잘 못해도 그건 자기들 탓이지 내 탓이 아니지. 라는 뻔뻔한 마음으로 결국 자리를 수락했다.
이후 나는 그곳에서 몇 년째 일을 하며 여러 차례 승진을 거치고 연봉을 올려서 아직도 근무 중이다.
워홀 초기 한인 숙소, 한인 업장의 유혹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내가 한국에서 가졌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이 낯선 땅까지 날아온 이유가 무엇 일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기를 정말 잘했다.
캐나다 현지 회사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했던 좌충우돌은 곧 이어서 적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