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천만 원 들고 캐나다로 무작정 날아왔다

영어는? 집은? 직장은?

by 캔디

농담인 척 스스로를 흙수저로 호명하는 삶을 살며 평생 내가 가진 게 없는 편인줄만 알았다. 캐나다에 나와보고 나서야 내가 한국에서 손에 쥐고 있던 게 아주 많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뻔한 통속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모든 것을 물질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는 한국이 싫다고 하면서도 나 역시 그 기준에 물들어 있었던 탓일까, 기반은 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에게는 살아온 동네가 있었고, 졸업한 학교와 지역 커뮤니티가, 동창과 친구들이, 힘들 때 돌아갈 가족, 그간 쌓아온 커리어, 그리고 무엇보다 유창한 모국어 실력과 내국인이라는 안정적인 신분이 있었다. 이 새로운 땅에서 지금 내게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밟아보는 북미땅에 짐가방 하나 덜렁 든 채 떨어진 나는 공항 이민국에서 비자를 받았다. 워홀을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물어봤던 질문 중 하나는 영어는 어떡하고? 였다. 나는 유학이나 어학연수는커녕 서양권에 여행 한 번 해본 적 없지만 학창 시절 내내 영어 1-2등급을 유지해 왔고 토익 듣기 평가만큼은 항상 만점이기에 무작정 부딪힐 각오였다. 이민국에서 줄을 기다리는데 내 앞에 앉아있던 인도 남자가 내가 한국인임을 눈치채고 넷플릭스에서 "갱스터 랜드"를 봤냐고 말을 걸었는데, 대체 갱스터랜드가 뭔 소린지 세 번 물어보고 나서야 그가 "킹더랜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전 영어는 듣기 평가처럼 평이한 악센트로 천천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는 기회였다. 영어에 관한 얘기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하겠다.


더 이상 이 나라에서 나는 유창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두 번째 깨달음은 숙소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사는 나라에 오게 되었으니 당연하게 안정된 주거지가 없이 계속해서 임시로 떠도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정도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우선 캐나다에서 집을 구할 때는 한국처럼 그냥 부동산 가서 알아보고 원룸에 입주하는 형태가 아니다. 서울에서 나만의 공간인 월세집을 구하고도 남는 예산 100만 원으로 밴쿠버에서는 보통 남의 집에 딸린 방 한 칸에 세를 들어살 수 있다. 그래도 백만 원이면 창문 있는 방에라도 들어갈 수 있지, 70만 원대로 떨어지면 창문도 없는 창고(덴)이나 베란다(솔라) 같은데 침대 하나 (운이 좋으면) 책상 하나를 놓고 살아야 한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는 밴쿠버 하우징 버블이 가장 커졌을 때라, 하우스를 다른 사람들과 셰어 하며 쓰는 화장실 포함한 마스터 베드룸의 시세가 1200-1300불 (한화 120-130만 원)정도였고, 세컨드 베드룸이 900-1000불, 덴이나 솔라가 7-800불 선, 그 밑으로는 거실에 커튼을 쳐놓고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에서 살아야 했다. 또 부동산을 끼지 않은 개인 거래가 매우 많으며, 세입자가 불법으로 다른 방이나 거실을 2차로 세놓는 형태도 많다. 집주인이 같이 살지 않을 경우에도 무조건 불법이지만 이런 경우도 역시나 많았다.


비자를 받은 나는 우선 미리 한국에서 예약해 둔 임시숙소로 향했다. 당시 현지에서 어떤 형태로 집을 구하는지, 시세는 어떤지 등에 어두웠기 때문에 우선은 한국 커뮤니티를 통해 한인타운이 있는 코퀴틀람에서 한 달간 숙소를 계약했었는데, 화장실도 안 딸린 방한칸에 1200불이라는 가격을 받는, 지금 생각하면 딱 아무것도 모르는 워홀러들 등골을 게딱지처럼 싹싹 뽑아 드시는 집이었다. 심지어 그 돈을 받고서도 집열쇠가 하나밖에 없다며 열쇠조차 주지 않아 집주인이 낮잠 자느라 문을 안 열어줘 두 시간을 밖에서 기다리기만 한 적도 있다. 그 집은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입주 첫날부터 코퀴틀람이 얼마나 부자들만 사는 동네인지를 늘어놓고는 그 직후 특종 인종은 멍청하고 특종 인종은 무슨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얘기를 시작했다. 밴쿠버 물가에는 어두웠어도 이런 올드한 교포 마인드의 한국인들과 살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았던 나는 입주와 동시에 다른 숙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임시 숙소 부부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폭리에 가까운 가격에 방을 제공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새로 온 한국인들에게 계좌 개설, 신넘버 개설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처음 캐나다에 온 한국인들은 영어도, 새로운 시스템도 낯설다는 사실을 이용해 그런 과정들을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한인들을 자신의 집에 묶으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월에 120만 원이나 주고 방한칸을 쓸 호구를 찾기는 어려우니까. 나에게도 같이 계좌를 개설하자, 한인 뱅크텔러를 연결해 주겠다 등등 감언이설을 했지만 나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내가 직접 은행과 서비스 캐나다에 가서 스스로 필요한 모든 서류 작업을 마쳤다. 그들은 참 혼자서도 빨빨 잘 돌아다닌다며 비꼬았지만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매일 새벽같이 그 집을 나와 밴쿠버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처음 며칠은 밴쿠버의 쇼핑몰들을 주야장천 구경 다녔는데, 할 게 없지만 그 집안에는 있기 싫어서 쇼핑몰이 전부 오픈하기도 전에 먼저 들어가서 푸드코드 책상에 엎어져 몇 시간을 자다가 일어나서 쇼핑몰이 다 개장하면 그때부터 돌아다니고는 했다. 나는 한 달도 안 되어 그 집을 나왔다.


그렇게 처음 만난 한국인에 학을 떼고 두 번째 집 부터는 완전히 외국인들로만 구성된 집을 찾기 시작했다. 좀 싼 가격에 혹해 뷰잉을 보았던 첫번째 집은 각종 국적의 여자애들이 10명이나 살고있는, 기숙사나 마찬가지인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집이었다. 그 집에 충격을 받은 상태로 그거보단 깨끗하고 3명밖에 살지 않는 바로 다음 집의 뷰잉을 마치자마자 급하게 계약을 했다. 마찬가지로 화장실도 공용이면서 싱글베드 하나만 덜렁 있는 (책상이랑 의자는 내가 나중에 요청하자 어디서 중고로 주워왔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인 걸 갖다 줘서 내가 싹싹 닦아 썼다.) 썩은 900불짜리 방이었지만 그때는 단순히 다른 공간을 찾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좋았다.

그 집 뷰잉을 할 때는 집안에 좋은 향도 피워놓았었고, 콜롬비아인 형제 둘과 그중 한 명의 인도인 여자친구로 이뤄진 세명의 룸메이트들도 다들 친절해 보였다. 그러나 위치가 정말 이상했는데, 우리 집 앞뒤로 전부 공업단지였고, 심지어 집 뒷마당은 어떤 사업체의 주차장으로 계약을 맺어서 늘 인부들로 바글바글 했기에 창문을 조금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최악인 것은 룸메이트 세 명이 전부 대마초를 집안에서 핀다는 사실이었다. 룸메 구인글에 조그맣게 420 프렌들리라고 한 줄 적어둔 것을 캐나다 문화에 무지한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입주한 탓이었다. 캐나다에서 420은 대마초를 의미했다. 뷰잉 때 은은하게 났던 향냄새는 사실 대마냄새를 가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켜놓은 거였다. 뷰잉날 이후로 그들은 한 번도 향을 켜지 않았다. 대마초 필 때의 냄새 자체도 끔찍하지만, 대마초는 다 피고 나서 아침에 담배쩐내가 최악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매일 아침 그 끔찍한 썩은 내를 참으며 출근하느라 폐가 썩는 줄 알았다.


또 의사소통에도 좀 문제가 있었는데, 넷다 영어를 하지만 아주 힘든 콜롬비아와 인도 억양을 방금 캐나다에 온 내가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좀 있었다. 그들도 내 한국어 악센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무의미한 되물음만 하는 경우가 계속 생겼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자연스럽게 대화를 피하게 됐다. 또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했는데, 그들 셋은 거실에서 새벽 2~3시까지 담배를 피우며 매우 시끄럽게 떠들고 웃어댔다.

결국 어느 날은 자다가 일어나서 내 방에서 들리는 그들의 고함과 웃음을 녹음해 들려주면서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세 시간 후에 출근을 해야 하니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자 형제 중 남동생이 나에게 앙심을 품고 내가 오후 1시에 세탁기를 돌리자 갑자기 방에서 나와 "자신은 이 시간에 자니까 조용히 해달라며" 세탁기를 꺼버렸다. 내가 그럼 몇 시에 돌리면 되는지 알려달라고 하자 "내가 너한테 내 스케줄을 왜 알려줘야 되냐"며 "나가서 빨래방에 가서 돈을 내고 하던 친구집에 가서 하던 알아서 하라"는 미친 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 누가 봐도 새벽에 고함 못 지르게 했다고 대놓고 보복하는 행동이었다. 심지어는 걔의 형까지 나서서 뭐 하는 거냐 "이 집은 복수하는 집이 아니다"라고 말렸는데 그는 형 하고도 싸우며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때 이 집에서의 이사를 결심하고 이삿날 그에게 문자로 '정신질환은 초기에 진단받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경험자로서 진심 어린 조언과 주변 정신병원들 약도를 보내주고 그들을 차단했다. 남동생의 여자친구로부터 왜 내 남자친구에게 문자 하냐는 팔팔 뛰는 문자가 왔지만 그녀 또한 차단했다. 그렇게 내 두 번째 집과도 작별했다.


앞선 두 개의 숙소를 거치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룸메이트 하는 건 정말 못하겠다. 결국 나는 그사이 입사한 회사에서 만난 최애동기를 열심히 꼬셔서 그녀와 세 번째 집에 들어가 단 둘이 살게 된다. 2000불 조금 넘는 하우스였지만 1층 전체 단독 사용에 주인집과는 입구까지 분리되어 마치 둘이서만 한 집에 사는 것 같았다. 같이 장을 보고 이케아에 가서 가구를 샀다. 지금 돌이켜봐도 캐나다에서 보낸 최고의 시간 중 하나였다. 아직도 그 집에 처음 입주하던 날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공기와, 매일 집에 돌아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반겨주고 같이 맛있는 걸 해 먹고 재밌는 얘기를 하던 나날들이 그립다. 우리 둘 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던 시간이었기에 가능했고 그렇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결국 초창기에 아무 인적자원이 없던 시절에는 각종 썩은 집, 아니 썩은 방들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지만 회사에 다니고 친구가 생기며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특히 이민자로서 같은 이민자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많이 만나고 나니 결국 비슷한 신세의 친구들과 좀 더 나은 예산 사정으로 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초반에 미친 하우스메이트들과 미친 집주인을 만나 고생하더라도 조금만 꾹 참고 버텨보라고, 해 뜰 날이 온다고 알려주고 싶다.


이제 집 구하던 나날의 이야기는 끝났으니, 캐나다 취업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어디에서? 다음 편에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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