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럴까?
이민? 왜?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란데?
이민을 결심하고 주변에 알리자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다. 배달이 얼마나 빠르고, 시스템이 잘 돼있고, 치안이 좋고... 그건 그거고. 배달 빨리 받으려고 태어났어? 동사무소에서 행정처리 오래 안 기다리는 게 삶의 목적이냐고?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들고, 결국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라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중증 우울증에 빠지고 종내는 삶을 끝내고까지 싶어진다.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배달 빠르면 좋지. 근데 퇴근하고 매일매일 배달음식에 소주 마시면서 폭식했다. 그거라도 안 하면 삶에 낙이 없어서. 나는 진지하게 한국음식이 맛있는 이유가 그거라도 맛있지 않으면 한국인들이 살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식도락으로 푸는 민족이다 우리는. 근데 이렇게까지 살고 싶어서 먹는 거면 문제가 있다. 남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그랬다. 한국은 모든게 빨리빨리라서 좋다고? 그 빨리빨리를 나는 누리기만 하며 살 수 있나? 한국에서는 나 역시 그 빠르고 좋은 서비스 제공자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살인적인 과로와 시청률과 조회수라는, 눈으로 직접 보이는 결과물, 그에 따라 실시간으로 주가처럼 달라지는 나의 가치. 내 연출작이 대박 나면 최고의 인간, 망하면 쓸모없는 인간. 그런 삶을 살다가 결국 식이장애와 우울증, 공황장애를 얻고 퇴사했다. 어디서 여러 번 들어본 것 같은 뻔한 스토리대로.
번아웃은 남의 얘긴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내 얘기였다. 20대 초반 가장 젊은 시절을 매일매일 새벽 서너 시에 잠들어가며 가진 아이디어를 모두 갈아 넣어 남의 회사에 바친 대가는 극도의 무기력증이었다. 이제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가장 좋다고 하는 직업을 가져서, 내가 가장 재밌을 거라고 생각한 일을 하면서, 업계에서 가장 최고의 회사들을 거치고 결국 일을 때려치운 나는 모든 목표를 잃었다. 이제는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이거보다 재밌고 선망할만한 직업은 못 가질 텐데. 삶에 욕심이 없어졌다. 나는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그러자 마침내 다른 선택지가 눈에 들어왔다.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더 좋은 포지션을 얻는 게 목표였을 때는 영원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해외살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 해외살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때는 무려 8살 무렵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에 엄마에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했다. 당장 생활비도 빠듯한 집안에서 기가 찬 소리였기에 엄마는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딱 잘라 갈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나는 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 제2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습득할 수 있는 나이에 유학 못 간 거 나중에 내가 정말 후회할 텐데. 그때는 단순히 영어실력을 길러야 미래에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유학을 가고 싶어 했지만, 자라면서 나는 점점 더 다른 나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 자체가 늘 맞지 않는 옷 같았다.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성격에는 참아야 할 부조리가 너무 많아 하루가 고문이고 소문난 쌈닭으로 살게 되었다. 사회에 맞지 않는 톱니처럼 자꾸 부딪히고 갈릴 때마다, 마음 한편에는 해외 살이라는 선택지가 방 한 칸에 놓아둔 화분처럼 오도카니 자리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으나 항상 '개인 여비' 항목의 벽에 부딪혔고, 기껏 진학한 대학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교환학생 제도가 중단되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호주 워홀을 신청했으나, 동시에 대형 방송국에 취업하게 되면서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며 해외 살이의 꿈을 접어야 할 듯했다.
그러나 공황과 우울감을 얻고 마지막 회사를 관둔 이후, 매일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방 한구석에 있던 화분과 눈을 마주쳤다. 어린 시절부터 내 오랜 꿈이었던, 해외살이. 그 길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지원했다. 추운 날씨에 치를 떠는 여름 인간임에도 호주가 아닌 캐나다를 고른 이유는, 일을 하면서 얻은 허리디스크로 인해 호주 워홀에서 세컨드 비자를 오픈하기 위해 거의 필수인 농장 일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영어만 쓰며 살아본 적이 없어서 내 영어실력이 가늠되지도 않았고 해서, 힘든 호주 억양 속에서 시작하느니 미국과 비슷한 캐나다에 먼저 살아보고 이후에 옮겨가자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지원할 때까지만 해도 캐나다 워홀은 1년씩 1회만 가능했다.) 그렇게 덜컥 지원한 워홀에 덜컥 합격하고, 덜컥 출국 일자가 잡혔다.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뜯어말렸다. 졸업면담을 위해 만난 지도교수도 지금이야 네가 어리지만 워홀 다녀오고 나면 이십 대 중반인데 그때는 더 이상 막내도 아니다, 가서 커피나 내리고 와서 한국에서 그 경력을 뭐라고 설명할 거냐, 등등의 말로 겁을 주었고, 내 워홀 통보를 들은 엄마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부터 터트렸다.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란데 떠나? 다들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지만, 전 국민이 자살하는 좋은 나라에서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느니, 다른 나라 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애초에 밖에 나가 살아봐야 한국이 그렇게 좋은 나란히 아닌지 구분이 될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