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이 취업이 힘든 시기가 아니었다. 수 많은 케이블방송사가 개편하는 때였다.
당연히 일자리 수요가 많았고 나 또한 그 때를 잘 만났기에 대학졸업전에 우리나라 대표 통신기업 K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당시 전자통신공학과 선배와 동기들은 대부분 취업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나는 회사원이 되었고, 같은 회사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워킹맘이 되었다.
결혼 후 따라오는 육아문제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와 남편은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해야 했었고, 친정부모님은 울산에 계셨다.
친정 엄마는 자신의 첫 손주를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정성껏 키워주셨다.
나는 서울에서 울산으로 매주 장거리 여행을 하였다.
아이를 보러 가기위해 금요일 근무가 끝난 후 심야 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고, 일요일 늦은 시간 서울로 올라오는 장거리 이동을 4년동안 반복했다.
힘들어도 아이를 봐야 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기에 보고 싶어면
무조건 가야했다.
주말에만 만나는 엄마를 아이는 처음에 어색해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삼촌도 이모도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를 독차지 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에 매번 나는 이 아이의 엄마임을, 떨어져 있어도 결국 엄마임을 느꼈다. 물론 친정엄마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섭섭하다하면서도 애잔하게 우리 모자를 쳐다보았다.
4년 만에 함께 살게된 아이는 생전 처음으로 어린이집으로 갔다.
퇴근이후 아이를 데리러 가게 되면 출입문을 바라보며 나를 기다리는 아이의 눈빛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아이도 적응하느라 힘들었는지 얼마지나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해야했다.
4년만에 둘째아이가 태어났다.
둘째아이도 친정엄마에게 의탁했다.
4년의 손주돌봄으로 훅 늙어버린 엄마에게 또 4년의 시간을 안길 수 가 없어서 둘째 아이는 첫 돌이 지나자 마자 바로 데려왔다.
둘째를 임신하고 있을때 터 어린이집을 예약해 두었다. 덕분에 둘째는 첫 돌이 지나자 마자 최연소 나이로 어린이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일하면서 6살, 2살의 아이들과 본격적인 육아전쟁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직장내 어린이집에 맡길수 있었기에 다른 워킹맘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그렇지만 워킹맘은 워킹맘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아이들은 커갔다. 아이들이 클수록 엄마의 손이 필요없을 것 같지만 아니였다.
엄마의 손길은 늘 필요충분조건을 채워야 했다.
결국 첫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퇴사를 결심했다. 아무도 못말리는 중2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이 시간을 함께 하지 않으면 후회로 남을 듯 했다.
직장다니는 엄마가 갑자기 퇴사를 결정하자 아이들은 모두 반발했다.
“엄마가 쉬고 싶으면 휴가를 내세요, 우리 핑계되지 말고,....”
“엄마가 회사 그만두면 우리 가난해지잖아.....”
아이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미 때를 놓친것인가 하는 생각에 섭섭했고 두려웠다.
다행히 회사를 그만두고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다시 회사를 가지말라고 나를 말렸다.
뒤늦게 가진 아이들과의 시간은 소중했다.
아이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어라고 이모가 말했다.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오랜만에 만난 이모의 그 한마디에 퇴사하길 잘했구나 안도했다.
퇴사를 하고 11년이 되었다.
첫째 아들은 군대를 제대하고 일본명문대학에 편입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둘째 아들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집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챙기고 있다.
워킹맘으로서 아이들과 가졌던 시간, 퇴사 이후 좀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할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시간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지금 무뚝뚝한, 사춘기 방황을 겪고 있는 아들을 키우고 있는 용감한 엄마들과 차 한잔 하며 수다뜨는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