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글을 쓰며

나에게 하는 충고 혹은 협박

by 세번째 삶


이 글은 내 브런치 100번째 글이다. 브런치 앱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99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수지만 의미를 담자고 하면 무궁무진할 것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얼마 안 되어 얼결에 100일간 매일 글을 써보기로 했다. 꾸역꾸역 이어가면서 처음 의지는 사라지고 점점 해야 한다는 압박에 눌려 지쳐갔다. 그렇듯이 '왜 해야 하는가'의 숙고가 없었던 탓이다. 즉흥적으로 그냥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야, 는 사실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자주 경험했기에 안다.


게다가 내 글이 소설 《라이팅 클럽》의 영인이 '쓰레기'라 부르던 그런 글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영인이 읽었던 계동 글쓰기 모임 회원들의 글은 재미라도 있었을 것이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내 글이 쓰레기 같았다.


매일 쓰는 것의 힘을 믿고 싶지만 나는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게 맞는 건가, 핑계 김에 매일 글쓰기를 멈췄다. 글은 쓰고 싶을 때 쓰면 되는 거야, 인내심 부족에 그럴싸한 변명을 붙여 가면서. 그때 매일 늘어난 덕분에 글의 개수는 불어났다. 이제 와 보면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만.


숨통을 죄던 부담이 잊힐 때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내심이 부족한 대신 내게는 잘 잊어버린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동안 쓰지 않던 블로그는 브런치보다 부담이 적어 편했다.

그러다 점차 일상의 끄적임은 블로그에, 좀 더 정리하여 진전된 생각은 브런치에, 그리고 적절하다 싶은 글은 기사로 쓸 수 있게 정리가 되었다. 글을 쓰려는 마음이 조금은 커졌고 쓰는 힘도 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기고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본 뒤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각자의 잣대로 비난하는 목소리는 다시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남편과 각방을 쓴다는 어느 시민 기자의 글을 읽고 갖가지 자신의 논리대로 재단하고 비방하는 댓글을 본 뒤에는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사람들의 일방적 공격에 부딪히면 내 멘털이 바사삭하고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써야 하며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의기소침해진 나는 쉬운 답을 찾으려 애썼다.


- 의견의 차이가 생길 수 없는 것만 쓰는 거야.

- 깊이 들어가지 말고, 얕은 것만 하자. 어차피 깊이 아는 것도 없잖아?

- 괜스레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아는 척하려다가 망신만 당하는 수가 있어.

-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지.


편한 길로 가자고 나를 유혹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매일 글을 쓰겠다고, 글의 숫자만을 채우려고 아등바등했던 나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든, 무엇이든 쓰라는 많은 사람들의 설득을 뒤로하고 나는 내 생각을 말하는데 이미 소극적이 되어버렸고 이때까지 애써 길러온 글과 뚝심의 근육은 한순간에 소실되었다.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했다. 이런 '쓰레기'를 누가 읽겠어, 누군가 이런 글을 읽느라 시간을 쓰게 하는 것도 잘못이야, 같은 말로 자기 비하에 이르곤 했다. 작가의 서랍에는 많은 글 조각이 쌓여갔다.




그렇다면 일상을 일기처럼 적은 글은 쓰레기일까? 뭔가 깊이 있는 통찰이 있어야만 할까?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한 글들은 가치가 없는 걸까?


브런치에서 서핑하며 글을 읽다가 브런치의 수익구조에 대한 어느 작가님의 글을 읽었다. 나는 '내 글이 돈을 주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생각이 머물렀다. 굳이 돈을 받지 않더라도 내 글이 독자의 시간을 살 가치가 있는가를 물으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다. 내 글도 시간 낭비이고 쓸데없는 글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글들은 정말로 쓰레기인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쓰레기일 뿐일까?


《라이팅 클럽》의 영인은 '쓰레기'라 부르는 자신의 글 뭉치를 늘 갖고 다닌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거기에서 힘을 얻었다. 계동의 글쓰기 모임에서 글을 쓰는 동네 주부 회원들은 쓰레기 같은 글을 쓰는 것으로 삶을 견딘다.


산문집 《긴 봄날의 짧은 글》에서 나쓰메 소세키 같은 대단한 작가도 '이렇게 바쁜 세상에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읽을 틈이 있을까? 이런 것도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안도했다.


《소설가의 귓속말》에서 이승우 작가는 '텍스트는 읽는 이의 세계관과 경험과 인식의 마이크를 통해서만 말한다'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쓰든 읽는 것은 읽는 이의 마이크를 통해 인식되는 것이니까 그것까지는 내가 어찌할 수 없잖아,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왜 하필이면 브런치에 그런 걸 써서 지면을 낭비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쓰는 즐거움을 그것도 진지하게 쓰는 즐거움을 준 곳이라 하면 답이 될까. 게다가 글은 독자가 있는 곳에 써야 맛이 아닌가?






여기까지 쓰고 빨래를 널고 왔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글을 시작했는지 잊어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봐도 모르겠다. 글은 쓰기 시작하면 제멋대로 흘러간다더니.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나에게 하는 다짐이라고 해야 할까? 충고 혹은 협박으로 마무리해보련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을 포함하여 나의 첫 100개의 글을 발판으로 삼아보자. 100번을 다져 만든 발판을 밟고 올라서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100개의 글이 100개의 부끄러움일지라도, 뻔뻔함으로 무장하고 한발 더 나가보자. 이제 땅 짚고 헤엄치는 일은 그만 하자. 하다 말고 하다 말기 일쑤, 쉬운 길만 찾아다니는 나에게 너는 평생 그렇게 살다 갈 것이냐는 협박을 보내며 100번째 글을 마친다.






쓰다 보니 100번째 글까지도 여전히 부끄러운 글입니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글이 부끄러워 다시 글을 쓰고, 쓰고 나면 부끄러워 또 이런 글을 씁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처럼. 언젠가는 술이 아니라 글에 늘 취해 있게 되는 날도 오리라 생각합니다.

브런치 내에 쓰레기를 자꾸 만들어내는 미안함이야 있지만 소각하며 환경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쓰레기라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쓰레기가 쌓인 만큼 솜씨도 나아지길 기대합니다.

내 글이 독자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는 날이 어서 오길 두 손 모아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