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고'입니다

첫 번째 브런치 북을 내면서

by 세번째 삶

나는 늘 가운데였다. 오빠와 여동생의 가운데. 좌파와 우파의 가운데. 찬성과 반대의 가운데. 성실과 불성실의 가운데. 부지런과 게으름의 가운데. 언제고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못했다. 그것은 좋은 것이었을까? 안 좋은 것이었을까?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은 것과 안 좋은 것, 이분법이 익숙한 나는 가운데가 싫었다. 늘 나는 왜 그럴까 고민해야 했다. 무 자르듯 두 개로 갈라서 어느 한쪽만 집어 들 수 있기를 바랐다.


배우 송승헌이었던가, '그대 그리고 나'라는 드라마에서 어떤 역할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그리고'라 답했던 기억이 있다. 누가 내게 너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그 답이 떠오른다.


나는 '그리고'입니다


'그리고'는 다리다. 다리는 어떤 두 개의 존재를 연결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그래서 좋다고 생각될 때보다 안 좋다고 생각될 때가 더 많다. 자기 주체의 어떤 주장을 하기보다 다른 중요한 존재를 돕기 위해 있는 것이다. 다리는 그냥 사이에 낀 존재일 뿐이다.




도형심리를 배운 적이 있다. 도형을 이용해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읽어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강사는 강의에 앞서 각자 도형심리 테스트를 하도록 했다. 읽는 방법을 배운 뒤에 결과를 보았다. 몇 개의 전형적인 성격을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내가 없었다. 이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혼란형. 거기에 내가 있었다. 이게 뭐야,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에게 가서 따지듯 물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나는 나를 규정하는 말을 싫어한다. 나도 모르게 그 말대로 변하게 될까 봐. 결과적으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선후가 어찌 됐든 나는 혼란형이 맞았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는 변하게 될까? 정체성이 혼합되어 있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그럴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나 확신할 수 있나, 의심했다.

카프카는 작품 <승객>에서 어떻게 스스로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가 의문을 가졌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던 작가의 말을 떠올리자 이해가 되었다.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는 다리처럼 끼여있는 존재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지만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다리의 존재 이유로써 조금 위안을 받는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저 단편적인 사건들로, 감정들로 스쳐 지나갔던 생각들을 글로 한 두 조각 모으니 '나'라는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어떤 종류의 관념적 구분에 나를 넣을 수 없다는 걸, 넣어선 안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서로 다른 수많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많은 작은 구성들을, 어쩌면 죽을 때까지 다 알지 못할 나를 하나하나 열어 보면서 진짜 나의 모습을 그려가려고 한다. 찬찬히 관찰하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빛나는 모습을 찾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그리고'이므로 나와 당신들이 연결될 수 있음에 그 누군가에게 티끌만큼의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며 첫 번째 브런치 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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