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Weekly 연재 - 당신 안의 썸띵 ③
[본격생활예술프로젝트] 예술하자 Let's ART
당신 안의 썸띵 ③ 누구나 그릴 수 있다 (2017.9)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었던 적이 있다. 비록 유치원 대표로 나간 그림경연대회에서 선생님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사자와 풀밭을 모두 갈색으로 칠해버린 적이 있긴 했지만. 어이없는 실수 한 번에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장래희망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주문을 받았을 때에도, 빵떡모자를 쓴 채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내는 한 화가를 묘사했다.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종종 심심할 때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즐겨 그렸던 소재는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림을 완성한 뒤 슬쩍 종이를 내밀고 나면 꼭 닮은 모습에 가족들은 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어 진지하게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 문득 어릴 적 꿈을 떠올렸다. ‘정말로 미술을 해볼까?’ 하지만 기둥뿌리 하나를 뽑아야만 갈 수 있다는 미대의 문은 너무나 높아보였고, 내 그림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보이진 않았다. 결국 나는 그렇게 꿈을 접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바쁜 대학생활, 사회생활에 쫓겨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종이와 펜은 늘 내 곁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작은 재능이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충분히 즐겼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문장을 발견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자신이 없는 이유는
실제와 똑같이 그리거나 ‘있어 보이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그런 선입견을 깨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눈과 감정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3차원 공간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누구나 나만의 선으로 한 점의 작품을 그릴 수 있습니다.
미루어놓았던 그림의 꿈, 지금 펜을 들어보세요.”
- 김효찬, 일러스트레이터
종이와 펜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감정이 담긴 나만의 선을 그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이지만 막상 실천해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안내하는 그림의 세계에는 전문가도 비전문가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그저 시키는 대로 다시 한 번 그림을 그려보았다.
1. 연필과 지우개 사용 금지
연필과 지우개로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한들 잘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못 그릴 그림이라면 뻔뻔하고 자신감 있게 틀려 보세요.
2. 시작한 그림은 무조건 완성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리던 그림을 제치고 페이지를 넘겨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드로잉 실력을 가로막는 나쁜 습관입니다.
틀렸어도 마음에 안 들어도 무조건 완성하세요.
드로잉은 정확히 잘 그리는 것보다 완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선은 가능한 한 길게
우리가 짧게 끊어 그리는 이유는 관찰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트는 보지 않고 그릴 수 있으나 눈앞의 상대방은 보고도 못 그리는 이유와 같습니다.
머릿속에 잔상이 생길 만큼 관찰을 하고, 한 번에 길게 그어 그리세요.
4. 덧선으로 그림을 수정하지 않기
연필과 지우개를 사용할 수 없으니 생각대로 선이 그어지지 않으면,
원래 긋고자 했던 곳에 선을 그어 마구 수정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그림이 지저분해질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어디를 잘못 그렸는지 확인할 기회조차 사라집니다.
못 그리면 못 그린대로, 잘 그리면 잘 그린대로. ‘천천히 그림을 끝까지 완성하는 것’.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말에 따르면 단지 이렇게 그림을 완성하는 것만으로 그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정말일까? 의심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 그리는 사람임을 잊지 마세요.
너무 잘 그리려 하지 말고, 너무 열심히 공부하지 마세요.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하던 축구처럼,
일요일 오후 혼자 해먹는 요리처럼
그냥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즐겨보세요.”
- 김효찬, 일러스트레이터
삐뚤빼뚤한 선을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덧선으로 고칠 수도 없다. 한 번 시작했으니 멈출 수도 없다. 정말 누구에게 선뜻 보여주기 힘든 실수투성이 그림이 눈앞에 완성된다. 당연히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딘가 모르게 피카소의 느낌이 나는 것도 같다. 사과를 움직인 모네마냥 그림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도 같다. 반 고흐가 자신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을 완성했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 게 아니었을까?
...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그림이 조금 전 나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