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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Jan 14. 2023

[단편] 새벽 4시의 연락

새벽에 오는 모든 연락에 대하여 


[살아 있지?] 


새벽에 온 이메일에는 대뜸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언니였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지독한 시간을 걷고 있을 무렵 내 곁을 지켜주었던 언니. 그 이메일을 받고 가장 처음 솟아난 감정은 분노였다. '살아 있냐고?... 그럼 어떻게 내가 죽기라도 했을까봐?'. 하지만 이내 나는 내 감정을 다스렸다. 지난 3년간 단 한번도 안부 연락을 하지 않은 나였다. 그런 나를 언니는 무척 괘씸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안부를 묻지 않고는 못 견뎠겠지. 그래서 언니는 타협점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괘씸함과 걱정스러움을 섞은 단어를... 그래서 언니는 나에게 [살아 있냐]는 이메일을, 그것도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에 보내고야 만 것이다. 


[언니 잘 지내고 계시죠?] 천연덕스러운 이메일을 주절주절 적어나갔다. 나의 분노는 저기 멀리 감춘 채, 그저 해맑게 언니의 연락을 반가워하는 수줍은 동생의 페르소나로 새벽 4시의 이메일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면을 써도 나의 분노는 저기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나의 근황에 대한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애매한 문장으로 나의 근황을 퉁치고 있었다. 언니가 나의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길 바라면서... 


사실 그 무렵 나는 그리 잘 지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싫었고 잠시라도 고립되고 싶었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멀어지길 원했고 나만의 공간을 찾아 전전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잡은 4평이 조금 넘는 신축 오피스텔에 몸뚱아리를 뉘운 채 언니의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언니에게는 그저 해맑게 나의 근황에 대해 애매하지만 확실하게 긍정적은 분위기로 답변을 했다. 하지만 그날 온종일 나는 마음이 아파야만 했다. 잊고 있던 언니와 얽혀 있던 과거가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잘 지내야만 했다. 잘 지내야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어색한 답변에 언니는 [답장이 와서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그마저도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처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에 답장은 당연한 예의 아닌가? 하긴, 언니 주변에는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아서 꼭 그렇지도 않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10년 전 내가 가장 무너져 있을 무렵, 언니는 나의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나의 곁에서 나의 모든 것을 지켜주려고 애썼다. 어떨 때는 우리 엄마와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 나는 그것이 일종의 사랑임을 직감했다. 언니가 결혼할 때 내가 혼인서약의 증인이되는 것이라든지, 또 축가를 부탁받는 것이라든지, "너가 나를 제일 잘 알잖아"라는 뜬금없는 고백이라든지. 언니는 나의 무엇을 보고 대체 이렇듯 나약한 나를 신뢰한 것일까? 그것도 가장 나약했던, 바닥을 치던 나를. 


나는 언니에게 나를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언니가 믿어준 나를, 언니가 믿어준대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언니가 원하던 대로 나는 여기에 있다고. 동시에 나는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언니가 본 나는 내가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거]. 언젠가 언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나를 신뢰했던 사람을 내가 배신했던 순간을 언니가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언니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결국, 언니가 이겼다. 가장 무너졌던 나를 바라보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언니는 나를 가졌다. 나는 언니에게 언제나 지고 만다. 언니가 나를 믿는 것이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강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언니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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