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잔치국수는 간단하지 않았다

by 해든

날도 더운데 간단하게 잔치국수나 해먹을까 라는 말에 발끈(?)하게 되는 이유는 사실 엄마의 잔치국수 때문이라고 해야 될거 같다.

엄마의 잔치국수는 고명이 많은 편이었다.

애호박과 당근은 기름 없이 볶아 식히고 오이는 채썰고 부추는 살짝 데쳐놓는다.

새콤한 열무김치 혹은 배추김치는 양념을 씻어내 먹기좋게 썰어두고 계란지단도 곱게 부친다.

가끔은 채썬 볶음어묵이 들어갈때도 있었다.

김가루와 양념간장 그리고 굵직한 풋고추와 쌈장까지 준비를 마쳐야 잔치국수가 상에 올랐다.

마지막에 미리 시원하게 준비해 둔 육수를 붓고 김가루와 깨소금까지 셋팅이 마쳐지면 그제서야 엄마는 우리를 부르셨다.

얘들아! 국수 먹자.

여름날, 국수 반 고명 반의 엄마의 냉국수는 푸짐했고 또 그만큼 시원하고 맛있었다.

두어가지 고명으로 간단히 만들어도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도 나 역시 이제 엄마의 번거로운(?) 잔치국수를 따라 만들고 있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간단한 잔치국수를^^


엄마의 여름에는 미숫가루와 우묵콩국도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해서 들어오시면 진하고 달달하게 태운 미숫가루에 얼음을 동동 띄워 내어오셨다.

어떤 날은 우묵이 들어간 콩국물을 준비해 두셨다가 주곤 하셨는데 차갑고 고소한 국물에 우뭇가사리묵이 주는 재밌는 식감의 조화가 좋아서 즐겨 먹곤했다.

수박 한통은 주로 반은 그냥 먹고 반은 화채로 먹었다.

사이다에 쥬스가루를 섞고 얼음을 가득 넣은 수박화채는 에어컨도 없던 시절 선풍기 한대로 버텨내던 한여름 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엄마의 강력한 필살기였다^^


감자분이 하얗게 포슬포슬 덮히고 아랫쪽은 살짝 눌은 기가 막히게 솥에서 잘 삶아 낸 감자(그 비법을 몰라 나는 매번 실패ㅜㅜ)

삼계탕을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전기후라이팬에 끓여 주시던 여름보양식 간장찜닭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새빨간 자두를 사오셔서 찬물에 담궈 두셨다가 책상위에 한 소쿠리 올려주시던 기억

제철 복숭아로 해마다 만들어 겨울까지도 먹을수 있었던 엄마표 홈메이드 복숭아통조림

돌아가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엄마가 해 주셨던 여름의 맛은 잘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살던 집, 바람이 잘 드나들던 시원한 대청마루에 배깔고 누워 찐옥수수를 먹으며 15소년 표류기를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던 여름날 오후

모기향 내음에 엄마의 부채바람 맞으며 사르르 잠 들던 여름밤의 날들

모두 참 그립다.

2025년 연이은 폭염에 지쳐가는 여름

엄마가 남겨 주셨던 여름의 맛과 그 여름날들의 추억들을 떠올려보며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