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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 May 29. 2021

[일년의 기록] 날 미치게 하는, 층간소음.

2020년 1월 ~ 2021년 5월, 아직도 진행중.

2020년 1월, 이사를 왔다.

아파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공급평수 18평,

실 평수는 14평밖에 되지 않는 원룸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집이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우측에 창고겸 옷방으로 쓰고 있는 작은 방 하나,

부엌을 지나면 또 우측에 화장실이 있고 그 안쪽으로 거실 겸 큰 방이 하나 있다.

적정인원을 따지면 1인, 아기가 없는 신혼부부까지는 그럭저럭 

지낼 만 하지 않나 싶다.


지어진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나이 느긋한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주변에 시장이 있고 교통이 좋다는 점 때문에 정이 갔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아보게 되어,

신나기까지 했다.

그 때는 몰랐다. '홈스윗홈'이 될 줄 알았던 이 집에 있는 것이 싫어,

주말이 오는 것까지 두려워하게 될 줄은.


2020년 1월말, 아침부터 유달리 시끄러운 소리에 일찍 잠이 깼다.

윗층에 올라갔다 온 남편이 윗집이 이사를 왔다고 했다.

그 전까지 조용했던 우리 윗층에 새로운 이웃이 생겼다.

그리고 비극이 시작되었다.


2020년 2월, 계속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소리,

'쿵'하고 둔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발 뒤꿈치로 꿍꿍! 내리찍는 소리도

이어졌다. 층간소음이 이런 것이구나-싶었다. 그래도 낮에는 참아야지 하는 생각에

며칠을 그냥 보냈다. 무던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소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한 번은 정중하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남편이 롤케익을 사 들고 윗집을 찾아갔다.

신혼부부인 줄 알았는데, 여자아기가 한 명 보였다고 했다.

뛰어다니는 소리, 둔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는 여자아이가

방에서 놀거나 소파에서 뛰어내리면서 내는 소리인 듯 했다.

남편의 부탁에 아주머니는 죄송하다고 하셨다. 

그래도 언짢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다.


롤케익을 사다드리고 며칠 뒤, 윗집 아저씨가 찾아오셨다.

아이'들'이 말을 너무 안 듣는다고 했다. 일찍 재워보려고는 하는데..

재우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이라고..? 남편이 올라가서 본 아기는 한 명이었는데, 

한 명이 아니라는 건가..? 

허리디스크가 생겨, 집 안에서 누워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남편은 내 몸이 좋지 않다며 부탁드린다고 한 번 더 이야기를 했다.



2020년 3월,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초등학생 남자아이 1명, 취학 전 여자아이 1명 총 2명이

우리 윗집에 살고 있었다. 절망스러웠다.

14평짜리 이 집에서, 두 명이 뛰어다니면 우리는 어디로 피해야 할까?

작은방에 가도 큰 방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집 밖으로 나가야만 겨우 벗어날 수 있는데..?

내 주말은?


아픈 허리 때문에 바닥에 누워 곁눈질로 티비를 볼 때도,

윗집에서 들려오는 뛰어다니는 소리, 간헐적으로 쿵쿵 뭔가 떨어지는 소리,

술래잡기하듯이 우와아아-몰려다니는 소리는 여전했다.

조심해주시겠다는 말을 믿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면서

눈물이 났다. 바보같았다. 나는 뭘 기대했던 걸까?


2020년 5월, 허리가 나아지고 날이 풀리면서

집 밖으로 많이도 나갔다. 집에 있는 일이 괴로웠다.

주말에 낮잠이라도 자고 싶어, 거실 겸 안방에 누워있으면

머리 위에서 계속 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결국, 한 번 더 윗집에 이야기 했다.

너무 시끄럽다고. 인터폰도 했다. 

현관과 붙은 작은 방에 두꺼운 매트를 깔았다고 했다.

'작은방'에만. 뛰어다니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작은방으로 보낸다고 했다.

아이들이 주로 뛰어다니고 소파에서 뛰어내리는 큰 방엔

담요 몇 장이 깔려있었다. 오직 담요만.


그 이후에도 참다 참다 안 되면 이제는 찾아가지 않고

관리사무소에 말씀드렸고, 관리사무소에서 인터폰을 해주셨다.

그러나 그 때뿐. 소음은 끈질기게도 우리를 따라다녔다.

나와 남편은 또 다시 케이크를 들고 올라가서 부탁을 드렸다.

아이들 얼굴을 보니 그 간 화났던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여전히 큰 방에는 매트가 없고 아이들은 이 좁은 집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주말마다 집에서 놀거나, 나간다고 해도 금방 귀가한다.

14평짜리 집에서 피할 곳 없이

소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생활이 

1년 넘게 이어지자

내 이해심도 바닥이 났다.


새벽 12시가 넘은 시간에 사람들을 모아 큰 방에서 집들이를 하던 윗집.

큰 방에는 매트를 전혀 깔 생각이 없는 윗집.

우리가 먼저 무언가를 드리면서 부탁해야 죄송하다고 하는 윗집.

그러나 말만 죄송하지 나아지는 것이 없는 윗집.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윗집.


나는 이해하지 않는다 이제서야.

처음부터 강경했어야 했다. 

나 혼자서 슬리퍼 신고 큰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한다고 해서

윗집이 우리에게 똑같이 배려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싸울 수 있다면 차라리 싸우고 싶다.

경찰을 부르거나 고소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렇게라고 하고 싶다.

차라리 그러는 것이 나을까.


1년 넘는 시간 동안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화도 나고 눈물도 나고 속이 많이 상하지만.

나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을 믿는다.

남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언젠가 눈물 흘리게 될 것을 믿고 버틴다.

이 믿음이 정신승리이자 피해자의 합리화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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