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정의 온도

- 뭉근한 45°C

by 소설 쓰는 라떼

사람들은 끊어진 인연을 두고 '시절 인연'이라 부르며 위로한다. 수십 년을 알고 지내며 서로의 세간살이도 알 만큼 각별했던 친구와의 우정이 마치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했을 때,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참 싫었다. 학창 시절에 얼굴을 맞대고 낙서를 끄적이던 해맑은 순간들부터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 속에서 느끼는 애달픔까지, 모든 것을 나누던 그 귀한 벗을 시절 인연의 때라며 놓아주기 싫었다. 그래서 더 집착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질질 끄는 관계는 어떤 사이든 서로에게 상처로 남는다.


시간이 흘렀다. 허무하게 끊겨버린 건 아니었다. 내가 진작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어야 했는데 친구를 많이도 괴롭혔구나...... 되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편안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열정적인 만남에 회의적으로 변했다. 함께 사는 배우자마저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고, 내가 낳은 자녀도 그 속을 알 수 없어 속이 뒤집히는 때가 수십 번이다. 그런데 어찌 친구에게 나를 다 받아달라고 투정 부릴 수 있을까. 반대로 친구의 무의식마저 끄집어내는 정신분석가 또한 될 수 없다.


'회의적'이라는 말은 냉소를 뜻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존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틈이 존재해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고, 기도를 나눌 수 있다.


지속적인 우정의 온도는 45°C 온도이다. 세균을 사멸시키는 100°C의 끓는 물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45°C의 물은 지친 발을 담갔을 때 편안함을 준다. 나는 이 온도를 닮은 '뭉근하다'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표현으로 발음할 때나 듣기에 화려한 느낌이 없어 좋다.


<캔바 AI가 내 설명을 잘 알아듣고, 만들어준 이미지>




1년에 한 번 정도, 헝가리에서 오는 친구가 있다. (두 살이 아래지만 인생 친구라지 아마) 각자의 삶에 충실하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간혹 카톡으로 브리핑을 하고, 서로를 위한 기도 제목을 나누는 우리는 그야말로 뭉근한 관계다.

친구의 바쁜 한국 일정 중에 한 번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두 번 만나고 가는 친구가 내가 아니어도 전혀 서운하지 않다. 전화 통화로 늘 나누던 이야기들을 얼굴을 마주하고서 깊게 나눈다. 농담과 셀프 디스까지 넘나들며 유쾌하기도 하고, 심오한 성찰이 있기도 하다.


친구는 늘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떠날 때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했다. 매번 있는 일이고, 막상 떠나고 나서는 다시 일상에 잘 복귀하지만 항상 떠나기 직전, 마음이 힘들다. 아마도 친구는 떠오르는 비행기에서 멀어지는 고향을 바라보며 삶의 궤적을 훑어보지 않았을까. 잘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말 잘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하고 한참을 씨름하다 괜찮아지곤 하겠지.


멀리서 보면 인생은 너무도 비슷하다. 남아있는 나의 삶도 같은 생각을 했다. 두어 시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몇 번을 돌아보면서 잘 가라는 손을 흔들 때, 나는 언제나 뭉클하다. (어떤 표현이 좋을까 고민하다 얻은 가장 적절한 말이다.) 가끔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하는데 이번엔 애써 외면했다. 일의 특성상 빨리 자야 하는 남편이 아이들 저녁을 담당하고 있을 터라 마음을 바로 돌렸다.

집에 들어서마자 서운함 마음을 빨랫감에 담아 세탁기도 돌렸다. 청소기와 식기 세척기 등이 돌아가는 소리에 일 년 반 만에 만난 친구와 헤어진 허함을 묻어버리고 남편 도시락을 쌌다. 아이들 숙제를 챙기고, 해야 하는 일도 남아 노트북을 켰다. 분명 헤어짐의 서글픔이 명치 끝에 걸려 있는데 소화할 틈도 없이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엄마의 자리로 복귀해야만 했다.


헤어질 때 울지 않아서 여운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눈물이 흐르게 놔뒀어야 했을까. 하지만 눌러온 감정들을 일상의 소음으로 희석하며 다시금 깨달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눈물 대신 성실한 하루로 이별을 배우는 과정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고 뭉근하게 삶을 지켜내는 것 자체가, 멀리 있는 친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원이자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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