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은 학원 백화점이다.(몇 해 전부터는 기세가 역삼동까지 확대가 되었지만)
내 아이의 실력과 니즈에 맞게 입맛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는 31 아이스크림과 같은 곳이다. 큰 길가에서 화려하게 빛을 내는 웅장한 건물이 아니더라도 대치동 골목골목마다 알토란 같은 보석 학원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아니 노다지 발견하듯 살피고 캐내야 발굴할 수 있기에 숨겨져 있다는 말이 더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대형 학원들이야 인터넷 홈페이지만 접속해도 어떤 커리큘럼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지, 레벨 구성은 어떻게 되고 입학 테스트는 언제 예약을 하는지 웬만한 내용들은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말한 소위 뒷골목 혹은 소형 학원들의 경우에는 주로 지인의 소개나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찾아가는 경우도 많다. 어떤 학원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간판도 달지 않은 채 소수의 특목고 아이들만 모아 수업을 한다고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티칭이 훌륭한 유명 선생님이 질 좋은 수업을 내 아이 맞춤형으로 족집게처럼 중요한 부분을 쏙쏙 골라서 입에 넣어 준다면 과연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곳이 바로 대치동의 가장 큰 메리트라 말할 수 있겠다.
아이들은 대치동에서 유명한 극심화 수학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입학테스트를 대비해 주는 학원에 4~6명 정도 팀을 꾸려 들어간다. 지인의 딸은 여름방학 포함 총 2달간 도시락까지 싸 들고 다니면서 하루 8시간씩 집중 수업을 받았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5학년 2학기 편입시험을 준비했다. 한 번의 불합격으로 실패의 아픔이 있던 터라 이번에는 더욱 강도 높게 수업을 받았고, 결국은 대기로 합격했다가 최종 입학을 했다. 입학테스트를 위한 준비 학원이 있다는 것은 나도 그때 처음 알았지만 이제는 대비하는 학원에 다녀서 합격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거나 숨길 일이 아니게 됐다. 오히려 무턱대고 제 실력대로 시험을 치렀다가 고배의 맛을 보는 것이 결과만 두고 봤을 때에는 더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원에 입학했다고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단원평가에서 일정 점수를 유지해야 낙제나 레벨 다운의 쓴맛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단평대비 과외를 따로 받기도 한다. 극 심화만 다루다 보니 기본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 경우도 생겨 서브로 개념과 응용/심화를 좀 더 꼼꼼히 잡아주는 학원을 다닌다. 학원이라고 일정 인원이 차야 수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 지금 수준과 진도, 스케줄에 맞게 1:1로 수업을 받을 수도 있다. 여기에 연산을 실수 없이 꾸준히 다지려면 집으로 오시는 학습지 선생님이 필요하고 그러면 어느새 수학만 1주일에 15시간 넘게 공부하게 된다. 숙제 시간은 제외하고 말이다.
KMO(한국수학올림피아드)를 준비한다면 주 3회 18시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건 아이들이 가려는 대학이 공대냐 의대냐에 따라 갈리는 선택적인 문제다. 공대라면 KMO를 준비해 금은동 색깔 상을 받아 특목고를 가려할 것이고, 의대라면 수능을 보니 굳이 KMO를 준비하지는 않지만 진도를 고등까지 미리 뺀 경우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경험 삼아 공부하는 것도 옆에서 보았다.
수학만 이렇게 열심히 다니면 끝날까? 영어는 서너 살부터 3-4년간 영어 유치원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초등 학원에서 꽃 피워야 하니 감을 잃지 않도록 초등 연계 학원을 가야 한다. 대치동 영어 탑 3, 탑 5의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나름 영어 꽤나 한다는 아이들이 주로 간다는 곳으로 보내려면 입학테스트 신청부터가 그야말로 전쟁이다. 1초 마감 컷이기에 전문인에게 돈을 주고 맡겨 예약을 성공을 시키고, 필기시험을 위해 본격적으로 과외를 붙인다. 학원마다 조금씩 문제 유형이 다르기 때문에 맞춤형으로 공부시켜야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지필 테스트에 합격하면 2차 인터뷰를 위한 과외도 빼놓을 수 없다. 합격을 하면 탑 반인지 아닌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며,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보면 A 학원의 아랫반을 다닐지 B 학원의 탑 반을 갈지에 대한 고민 글이 자주 보인다. 한 번 들어가면 2~3년은 쭉 다닐 텐데 조금 센 학원의 아랫반이 나을지 그보다는 자유롭지만 원장선생님이 수업을 해주시고 반 아이들 수준이 더 높은 탑 반을 갈 지의 문제가 어찌 보면 그 당시에는 일생일대의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뭐니 뭐니 해도 국어의 시대다. 수학은 개념을 탄탄히 잡고 수없이 풀고 반복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궤도에 올릴 수 있는 과목이지만 집을 팔아도 일정 수준 이상 따라잡기 힘든 과목이 바로 국어라고 한다. 전 과목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를 입학한 학생들도 학창 시절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과목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국어라고 대답한다니 결코 만만한 과목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2019학년 수능시험은 불수능이었고 국어가 역대급 난도로 평가받으며 만점자가 0.03%에 그쳤으며, 2022학년에는 만점자가 단 1명이었다. 이 여파로 문해력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국어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에 발맞추어 국어 입시학원은 초등까지 내려와 수능 대비를 해주게 되었다.
고학년이 되면 중등이 코앞이기 때문에 4,5학년쯤 되면 과학을 시작한다. 특히 영재교나 과학고를 염두에 둔 아이들이라면 물리/화학 올림피아드 대회를 위해 이미 중등 기본은 한 번 다 돈 상태이고 6학년 즈음에 심화를 공부한다고 한다. 과학 학원은 주로 주말에 수업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 1회 4시간씩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3개월씩 1년 과정으로 수업을 받는다.
사회는 저학년에는 주로 한국사 학원에서 시작해 고학년에 세계사 학원으로 이동하며, 한국사 능력 시험도 많이 치른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한자를 시작하기 때문에 저학년 때부터 학습지를 하거나 한자 학원을 다니면서 한자급수를 따는 친구들도 있다.
강남이라고 대치동이라고 유난하다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강남에 살고 이곳의 윤택한 인프라를 십분 이용하며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또한 내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대치동 학원들을 앞으로도 야무지게 잘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학원가를 비난하거나 여기를 다니는 아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아이에게 베스트 학원으로 취사선택만 잘한다면 대치동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아이들 맞춤형 슈트를 기가 막히게 재단해 주는 곳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가 좋다고 해서, 누가 가라고 해서, 누가 다니니까 등의 남의 집 아이를 칭하는 '누가'라는 단어 대신 '내 아이'를 대입해 보고 싶다. '내 아이'가 좋다고 해서, '내 아이'가 가보고 싶다고 하는 학원은 꼭 보내줄 생각이다. 주요 과목이 아닌 미술, 피아노, 테니스라도 말이다. 어차피 딸아이가 일하게 되는 10년 이후의 세상에는 한 개가 아닌 다양한 직업들을 갖고 살아갈 텐데, 혹시 아나? 우연히 접해 본 취미생활이 내 아이의 각광받는 미래 직업들이 될지.
시리우스
아이의 하원을 기다리며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보인다.
북극성일까? 아마도 시리우스겠지?
별들도 모두 저마다의 이름과 특징, 밝기가 각각 다르건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초롱초롱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가장 빛나는 단 하나의 별, '시리우스'가 되지 못해 오늘도 실망하고 좌절하고 아파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어른인 내가 참 많이 미안해진다.
각자의 소중한 재능이 소멸되지 않도록 반드시 지금보다 더 나은 교육제도가 생겨나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
수업을 마친 시아가 미소를 띤 채 빠른 걸음으로 내게 걸어온다.
그런 딸아이를 보며 속으로 되뇌어본다.
너는 이미 엄마의 시리우스라고.
(출처: 한국 교육과정 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