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고
이 책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였던 "빨강머리 앤"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의 필명은 "Ann"이다. 앤 이라고 읽는다. 당연히 빨강머리 앤의 "앤"이다. 몇몇 친구들이 이 책을 보고 내가 생각났다고 말했다.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를 사실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목과 표지 사진만으로도 나를 잡아끌었던 책. 하지만 정작 읽기 시작하니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니었다. 빨강머리 앤에 얽힌 여러 추억을 빨강머리 앤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밝은 느낌으로 가볍게 풀어나가는 에세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이 봐 왔던 "언니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다. "언니들이 알려줄게. 인생의 비밀을 말이야!"하고 조언하는. 한 마디로 특별할 것 같던 책이 조금은 평범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실망감은 책을 점점 읽어나가면서 흐려졌다. 내가 생각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녀의 조언들이 꽤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친한 언니가 과하지 않게, 자신의 경험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으며 조언을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글을 아주 잘 쓰는 언니가. 게다가 나처럼 빨강머리 앤을 아주 좋아하는 언니가.
그때 결심했다. 만약 문학상을 받게 된다면 나는 조금 다른 당선 소감을 쓸 거라고. 나 같은 ‘문학의 루저’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이유는 하나. 당선 소감을 보고 있을 마음 아픈 누군가에게, 나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 말은 간신히 용기를 낸 내가, 가장 약할 때의 나 자신에게 토닥이며 해줄 말인지도 몰랐다.
겸손함을 바탕으로 조심스러움을 곁들여 건네는 충고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도움이 되어주었다. 평소 내가 고민하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그녀의 생각들이 꽉 막혀있던 물꼬를 터준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삶을 사는 것, 좋아하는 일과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사랑과 연애, 인연 등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앞서 나가고 있는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아주 귀한 보물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자아 중심적인 강박이 나를 망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현재를 망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않고, 숨 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살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그녀의 따뜻하고 겸손한 조언 사이사이에 <빨강머리 앤>의 대사와 사진들이 등장한다. 사실 작가의 조언들보다 나는 빨강머리 앤의 대사,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이 좋았다. 나는 금세 추억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아, 맞아. 이런 대사가 있었지. 이런 장면이 있었어. 이래서 내가 빨강머리 앤을 좋아했던 거지!!' 그리고 내가 놓쳤던 부분들이 꽤 많았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사두었던 <빨강머리 앤> DVD세트를 꺼냈다.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비닐을 뜯고 1편을 꺼내 오래된 맥북에 DVD를 쑥 넣었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더니 낯익은 화면이 뜨고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너무 반가워서 나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앤은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녀의 감성은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지만 나의 감성이 바뀐 것이다. 나는 앤이 이렇게 슬픈 만화인지 몰랐다. 1편을 보면서 몇 번이나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앤을 처음 만난 그 시절엔 미처 몰랐던 감정이었다. 앤이 밝은 것이, 누구보다 여린 감성이, 긍정적인 자세가 다 마음이 걸렸다. 그녀는 고작 11세였다는 걸 이제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릴 적 친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반갑다가도 자꾸 마릴라 아줌마의 입장에서, 메튜 아저씨의 입장에서 앤을 보게 돼 마음이 짠했다. 내가 생각치 못했던 나의 반응이었다. 앤을 다시 만나면 마냥 반갑고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같은 또래였던 앤보다 지금 내가 나이를 훨씬 많이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앤"만 보이던 나에게 마릴라 아줌마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감정 변화도 뭉클하게 다가왔으니까.
하지만 "여전하다 여전해~"하고 미소 짓게 만드는 앤의 모습은 다시 한 번 내가 왜 긴 세월 동안 앤을 좋아했는지 증명해주었다. 알게 모르게 내 인생의 큰 방향, 분위기는 앤이 좌우하고 있었다. 힘든 순간, 혼란스러운 순간 내가 내린 수많은 결정들은 앤의 에너지와 많이 닮아있다. 매 순간 앤을 생각하며 산 건 아니지만 앤의 에너지가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이곳저곳으로 옮겨져 내 곁에 머물렀다. 여러 영화 속, 소설 속, 만화 속, 내 인생 속 캐릭터로 옮겨져 그것들을 따르게 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좋아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앤"이 원형이었던 것 같다. 앤의 변형된 캐릭터들을 무의식적으로 좋아한 것이다. 일본 영화나 만화 속 캐릭터들, 또 그런 분위기의 콘텐츠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최근 아주 재밌게 읽었던 <내일의 네코무라 씨>라는 만화의 '네코무라' 캐릭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 픽사의 애니메이션 <월-E>에서의 월-E 캐릭터 등등을 내가 사랑했던 것은 아마도 "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희망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냥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찾아가는 이야기들을, 그런 주인공들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책 덕분에 나의 과거로의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두고 온 소중한 것들을 챙겨 다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가장 친했던 앤도 함께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은 나에게 의미 있었다. 주머니 가득 챙겨온 것들을 다시 두고 가는 일이 없도록 살아가고 싶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소중한지 조금씩 더 알아가는 과정에서 다시 앤을 만나 다행이다.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