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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Oct 05. 2018

어른들의 동화

웨스 앤더슨 <문라이즈 킹덤>을 보고

출처 : 네이버 영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을 보았다. 그의 작품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작품을 본 이후로 그의 다른 작품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약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내게 너무나도 완벽한 영화였다. 특히 미술적인 부분에서. 어떤 장면이든 딱 떨어지고 화려하며 세련된 영화였다. 그런데 틈이 없어 보였다. 유머가 곳곳에 포진되어 있지만 웃을 여유도 주지 않을 만큼 틈이 없었다. 너무 완벽해서 보기가 부담스러운 영화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겁을 먹고 보고 싶은 그의 영화를 쉽게 열어보지 못하다가 왓챠 덕분에 용기를 내어보게 되었다. 매달 나가는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해서 보게 된 <문라이즈 킹덤>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여전히 꽉 막힌 도망갈 수 없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세계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 안에서 행복했다. 즐거웠다. 재밌었다. 




이 영화는 흔한 표현으로 어른들의 동화 같다. 아이들이 주인공을 맡았지만 어른들의 희망 혹은 꿈을 담은 이야기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 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 첫눈에 반한 운명 같은 인연과의 사랑을 위한 거침없는 도주. 온갖 위험과 장애물들을 하나씩 뛰어넘으며 둘은 더욱 끈끈해진다. 귀여운 하지만 멋지고 당당하고 용기 있는 연인.




역시나 이 영화는 눈을 휘둥그레져지게 만든다. 의상부터 소품 하나하나 눈에 담기 바쁘다. 아주 귀여운 아기 고양이도 나의 눈을 휘어잡는다. 고양이를 넣어가지고 다니는 케이지도 완전히 내 스타일. 그런데 고양이가 불편하진 않을까, 저 안에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몰입이 좀 깨지기도 했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지라......




극 중 보이스카우트의 마스코트를 보고 크게 한 번 웃었다. 너구리 모양이었는데 어른들이 그 너구리 모양의 마스코트를 진지하게 달고 있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그 영화 속의 어른들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극 중 랜디 대장이 사령관으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할 때 사령관이 그 너구리 마스코트를 랜디 대장의 옷에서 가차 없이 떼어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영화 속에서는 아무도 그 상황을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바깥에 있는 관객들만 그들의 꼴이 우스울 뿐이다.




샘과 수지의 도주를 위한 캠핑 도구들도 하나같이 아기자기하고 빈티지하다. 그리고 낭만적이다. 음악 플레이어, 책, 고양이, 텐트, 침낭, 쌍안경 등등. 하나쯤 갖고 싶은 디자인의 소품들. 아, 이 감독의 취향은 어찌도 이렇게 완벽하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저런 잡생각 따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딱 저렇게 챙겨 나와 문라이즈 킹덤 같은 장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를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대한 가볍게 입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음악을 들으며 신나게 함께 춤을 추었다가 사랑을 속삭였다가 책을 읽어줬다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스르르 잠이 드는......




딱히 아주 커다란 장애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런 것들을 동화 속에 가둬두어야 하는 건지. 이루어지지 않을 판타지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인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 이 영화는 나에게 시원하게 웃을 여유를 주었다. 조금 더 느슨한 유머들이 느슨한 텀을 두고 이어진다. 사실 다른 이들도 이 유머에 나처럼 크게 웃을지는 모르겠다. 나에게는 딱 맞는 유머 코드였다. 특히 혼자 구시렁거리는 유머. 힘주지 않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말이 더 재밌었다. 혹은 무표정하게 상대에게 돌직구를 던지는 유머도 나의 유머 코드와 딱 맞았다. 물론 이런 유머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도 분명히 나왔지만 그걸 즐길 여유가 부족했다. 그런데 <문라이즈 킹덤>은 리듬이 그보다 조금 더 느슨한 느낌이어서 충분히 웃다가 다음 장면으로 천천히 따라갈 수 있었다. 




시종일관 진지한 어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유머였다. 웃기려는 대사나 연기가 전혀 아닌데도 그 상황 위에 올려놓으니 저절로 코믹 연기가 되는 것이다. 전체적인 톤이 그렇다 보니 정작 보는 이들은 좀처럼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닥친 위기가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더 코믹해질 뿐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고아가 된, 돌봐줄 후견인이 사라진 샘이 새로운 가족을 만나 잘 적응해가는 모습을 수지가 자신의 집 창문으로 바라보다가 엄마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아래층으로 향하고 카메라는 샘이 그리던 그림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그 그림은 그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가졌던 문라이즈 킹덤이라는 해변가를 그린 그림이었다. 마치 동화 책의 가장 마지막 장을 덮은 후 표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 이렇게 동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고. 이 영화를 어른들의 동화라고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항상 영화의 결말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통에 웬만하면 마지막 장면을 기록해두기로 했다. (스포일러가 될지 몰라 간단하게만 적었다.)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엔딩 크레딧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그것까지 봐야 전부 보는 것이다. 그래야 완벽하게 막을 내릴 수 있다. 




 나는 오히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보다 이 영화 <문라이즈 킹덤>으로 웨스 앤더슨의 팬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다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볼까 싶다. 조금 더 다르게 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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