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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끝을 잡고

늦겨울 홋카이도 여행 프롤로그

by DANA
뜻밖의 홋카이도 여행


홋카이도北海道 여행은 매우 즉흥적이었지만, 어쩌면 홋카이도로 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을 '1'도 몰라도 한 번쯤은 간다는 칭다오青岛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자며 항공, 숙박을 모두 결정해둔 상황에서 한중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면서 여행을 5일 앞두고 칭다오 여행은 접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어디라도 가야 아쉬움이 풀리지 않겠는가. 마침 티웨이항공에 16만 원짜리 삿포로札幌행 항공권을 발견했다. 더 늦으면 이 티켓마저 없겠다는 조바심에 바로 결제했고 그렇게 여행지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칭다오에서 삿포로로 바뀌었다. 겨울 내내 각종 홋카이도 여행지 소개 프로그램을 보며 '언젠가는 홋카이도 한 번 갈 날이 있겠지'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늦겨울 정취가 남아있는 홋카이도로 떠나게 되었다.


맛 따라 길 따라 홋카이도

'홋카이도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홋카이도는 워낙에 넓어 삿포로와 오타루小樽, 비에이美瑛 여행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유명하다는 돈카츠 맛집은 명성대로 사르르 녹는 돈카츠를 선보였고 상하이 유학 시절 즐겨가던 고에몬五右衛門/일본식 파스타 전문점도 오랜만에 방문했다. 남편은 매 끼니 맛있는 것을 먹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매우 감사한 부분이다.


한겨울 도쿄 같았던 삿포로 시내

사실 최근 들렀던 일본 도시들이 대부분 작은 도시였기에 삿포로는 내게 매우 대도시 느낌이었다. 어쩌면 내 가 기대한 것과는 약간 달랐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조용한 일본 마을을 찾기 어려웠고 오히려 북적대는 도쿄 도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모이와야마 전망대에서 바라본 삿포로 야경

그런 삿포로 시내 여행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곳은 일본 3대 야경(나가사키/삿포로/고베) 중 하나라는 삿포로 야경을 볼 수 있는 모이와야마藻岩山였다. 늦겨울에 여전히 추운 날씨였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추위를 견디며 조용히 내려다볼 만한 야경이다.


오타루의 백미, 텐구야마에서 내려다보는 오타루
2013년 유키아카리노미치 축제 당시

오타루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남편이 예전에 유키아카리노미치雪明りの道 축제 때 찍어온 사진을 보고 나서였다. 그 모습에 아주 큰 기대를 가지고 오타루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 실제로 가보니 왠지 너무나도 상업화된 느낌이었다. 소도시인 오타루에 큰 기대를 가지고 갔는데 여느 큰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오타루 운하 역시 축제 기간이 아닌 때에 그것도 낮에 방문해서인지 큰 감흥이 없었다. 모든 여행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그런 와중에도 마음에 들었던 곳은 바로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お元気ですか' 장면을 촬영한 텐구야마天狗山에서 내려다보는 오타루의 모습이었다.


텐구야마에서 내려다본 오타루는 하늘, 산, 바다, 마을이 한데 어우러져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곳이었다. 이 장면을 내려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오겡끼데스까'를 외치고 싶어 진다. 홋카이도에도 점점 봄이 찾아오고 있었지만, 아직 새하얀 눈밭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지붕은 여전히 50c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두툼한 눈 이불이 덮고 있다.


두 번 세 번 가도 행복할 비에이

여행 셋째 날 렌터카로 떠난 비에이 여행은 이번 홋카이도 여행 중 가장 많은 추억과 여운을 남긴 하루였다. 물론 이는 남편의 운전과 안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왕복 6시간 운전을 감행했고 아름다운 사진과 영상도 많이 남겨주었다.


비에이에서는 이곳 명물이라는 카레와 사이다를 먹었다. 식당에서는 300엔에 파는 사이다를 슈퍼에 가면 210엔에 살 수 있다. 카레에 올라간 돈카츠가 맛있었고 사이다는 색소 맛이 강했지만 청의 호수를 연상케 하는 파아란 색이 매력적이다.


흰수염폭포
멀리 보이는 도카치다케 화산

아찔한 다리 아래로 보는 흰수염폭포白ひげの滝는 예쁜 물색깔도 인상적이지만 멀리 보이는 도카치다케十勝岳 화산이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활화산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산이 높아 구름이 걸려있네..'하고 바라보던 곳이 화산이라 더 놀랐다.


청의 호수

청의 호수青い池/아오이이케는 예상대로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상태였다. 이름과 같은 파란 호수는 볼 수 없었지만 새하얀 호수도 그 나름 분위기가 좋다. 겨울이기에 즐거웠던 점은 사람이 없어 고요한 자작나무 길을 배경으로 밀린 셀카 욕구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은 그대로지만 햇살이 따뜻해 패딩을 벗고 20분 넘게 있었는데도 그리 춥지 않았다.


켄과 메리의 나무 (ケンとメリーの木/켄토메리노키)
세븐스타 나무 (セブンスターの木/세븐스타노키)
(옆에서 본) 부모 자식 나무 (親子の木/오야코노키)
마일드세븐 언덕 (マイルドセブンの丘/마이루도세븐노오카)
크리스마스트리 나무 (クリスマスツリーの木/크리스마스츠리노키)

점심 후에는 본격적으로 비에이의 '나무'들을 찾아다녔다. 마치 '나무 순례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진으로도 여러 번 본 적 있는 마일드세븐 언덕 이외에도 다양한 명물 나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새하얀 눈밭에 잘 어울리는 나무들이었는데 어떻게 찍어도 예쁜 사진이 찍히는 마법의 공간이다. 해 질 녘에 들렀던 나무들은 석양빛이 더해져 다양한 색깔을 선사한다.


설원의 여우

드라이브 같았던 나무 순례길에는 멀리 설원을 유유히 걸어가던 여우와의 만남으로 더욱 즐거웠다. 반가운 나머지 '여우야~'하고 외쳤는데 그걸 알아듣고 가던 길을 멈춰 우리를 바라보고 철퍼덕 주저앉는 개인기를 보여주었다. 친정에 있는 야옹이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림 같은 비에이는 여전히 눈을 감으면 아른거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지만, 비에이역 앞을 중심으로 아주 예쁜 시골 마을이 있는데 다음에는 꼭 시간 여유를 두고 거닐어보고 싶다.

여행은 여행을 하는 동안 보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추억이 될 때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지난주에는 비에이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 또 한 번 좋은 추억이 남아 역시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칭다오 여행에서 얼떨결에 바뀐 여행 목적지였지만, 지나가는 겨울이 아쉬워 봄을 만나기 전에 눈 구경 실컷 하고 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충분히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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