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A Sep 03. 2019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합격기

넘나 힘들지만 잊을 수 없는 한 해

주의:  글은 2017   동안의 수험 생활을 압축한 포스팅으로서 매우  글입니다. 또한 현재 이대 통대 입시 전형이 바뀐 부분이 있으니, 정확한 입시 전형은  글이 아닌 이대 통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내 꿈은 통역사

  2017년 1월 통대 입시를 시작한 후로 '11월엔 과연 이 모든 것이 끝나 있을까? 내년에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만큼 불확실성과 긴장, 초조 그리고 기대가 늘 함께한 한 해였다. 그리고 마침내 꿈을 향한 관문을 통과해 꿈에 그리던 통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인 수험 생활을 시작하기 전, 친정에 들렀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봤는데, 내 꿈이 통역사라고 적혀 있었다. 결혼하고 잘 다니던 회사 관두고 통대 입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터라, 생활기록부 속 내 꿈이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어렸을 때 꿈을 드디어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얕보다가 큰 코 다치다


통대 입시를 위해 2016년 12월에 퇴사를 했다. 통대 입시는 대개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진행된다(물론 중앙대와 서울외대는 11월 말까지). 통번역 일을 줄곧 해왔기 때문에 혹시 운이 좋다면 그냥 붙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며 회사를 다니던 때인 2016년 10월 외대 통대 입학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보기 좋게 1차 불합격!! 역시 만만한 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며 퇴사를 결정하고 2017년 1월부터 본격적인 통대 입시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연습 또 연습, 반복 또 반복

  통대 입시 공부는 그야말로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티나'하는 싸움이었다. 입시 준비 초기에는 나 역시 외대 통대가 1차적인 목표였다. 그래서 외대 1차 시험인 요약(한/중지문 듣고 요약하기)과 확장(한/중 지문 보고 작문하기)을 위해 매일 같이 지문을 들으며 노트 테이킹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요약하는 연습을 했다. 1~3월까지는 입시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학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복습을 하고 그날 받은 자료는 그날 다 보자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어차피 한 자료를 꼼꼼히 보아도 며칠이 지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자료를 두루두루 보고 상식 먼저 쌓겠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적응이 되자 요약 연습이 더욱 절실해졌고 스터디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4월부터는 나와 동갑인 학원 친구와 팅리(听力/듣기) 스터디를 시작했다. 일단 요약은 하지 않고 듣고 노트 테이킹 하여 통역하는 연습을 했다.


 노트 테이킹 하는 방식도 1년 동안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달러 환율이 상승했다'라는 말을 들으면 곧이곧대로 '미 환율 상승'으로 쓰던 것을 나중에는 '$ ↑'로 쓰게 되었다. 이는 사람마다 습관화하는 기호가 다르고 매일 반복되는 연습이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부분이다. 학원에서 공부하는 통대 준비생들은 대부분 노트 테이킹을 위해 이면지를 2등분, 또는 4등분 하는데, 심지어 8등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도 이런저런 방법 써보았지만, 결국 내게 가장 좋았던 것은 A4용지를 가로로 놓고 접지 않은 채로 그냥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야 인과관계 파악과 단락 구분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칸을 너무 작게 나누면 앞뒤 문맥 잇기가 힘들었다. 이는 개개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습을 하면서 가장 편한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중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아오긴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이 학위를 제대로 활용한 적은 딱히 없다. 학위는 교육 쪽인데, 중국기업 홍보팀에 취직했다. 물론 중국에서 학위를 받아온 것이 취직을 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학위 자체보다 중국에 머물며 인턴 생활을 하고 통번역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통번역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중국 대학원 유학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험 생활에서 큰 슬럼프는 없었다. 물론 월요일은 언제나 힘들다. 힘들긴 하지만 매일 공부가 끝나고 남겨진 수많은 요약과 작문들을 보면 뿌듯했다. 오늘도 충분한 연습을 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불확실성'이었다. 알다시피 시험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만약 노력과 실력만으로 시험의 당락이 결정된다면 재수생이 되어서는 안 될 학생들이 많다. 시험은 '운'이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해도 혹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매일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승승장구하며 승진도 하고 아기 엄마도 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조바심이 난다. '나는 언제 다 하지..' 하는 그런 초조함. 그래도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보다는 이 시기를 이겨내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는 희망이 1% 정도는 더 컸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약간 늦게 발동이 걸리는 편이라 학창 시절에도 항상 1학년 1학기 성적이 형편없었다. 그러다 점차 적응하며 나아져 졸업은 우수한 성적으로 하는 편이었다. 통대 입시 생활에서 역시 1~3월은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았다. 사실 얼마나 안 좋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모의고사 등수를 10등까지만 적어주는데, 1~3월까지는 등수가 적혀있지 않았다. 스스로 실망할까 봐 선생님께 따로 묻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4월에 갑자기 3등을 하더니 그 후로는 계속 3~6등을 유지했다. 모의고사 점수가 최종 입시 결과를 완벽히 반영해주지는 않지만, 한 달에 한 번인 이 시험에서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한 것이 나에 대한 믿음을 이어갈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원서접수와 학교 선택에 대한 고민

  사실 처음 목표는 외대였지만, 갈수록 이대 통대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결정적으로 이대 입시설명회에서 한중과 교수님을 보며 '아.. 저분께 꼭 배워보고 싶다'하는 생각을 했고 인터넷에서 본 이대 통대 한중과 교수님의 인터뷰 영상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7월에 학원 분반을 하는 과정에서 외대반으로 할지, 이대반으로 할지에 대한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 만약 평소 요약/작문 수준이 아주 낮았다면 고민 없이 이대반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우수 작문으로 뽑히기도 하고 모의고사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외대 입시를 완전히 포기하기 어려웠다.
  물론 두 학교 입학시험을 모두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기는 하다. 하지만 오전에 외대, 오후에 이대 통역과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이대 통역과 시험은 1시와 3시로 나누어 진행되는데, 1시에 배정되면 시간상 외대 시험을 마치고 이대까지 가기가 힘들다. 일부 학생들은 퀵 오토바이를 타고서라도 가는데, 사실 이것도 장담할 수 없는 방법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성공사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3시 시험에 배정되면 외대 시험을 마치고 이대까지 가기 충분하기 때문에, 이는 운에 맡기고 3시 시험에 배정받기를 바라야 한다. 1시와 3시 배정은 수험번호 순서가 아닌 랜덤이다. 결국 운명에 맡기자는 생각으로 이대 통대도 원서접수를 마쳤다.


  시험 일주일 전, 이대 통역과 시험시간 배정 결과가 나왔다. 이 날은 최종 합격 발표날만큼이나 많은 친구들이 긴장했다. 수험번호가 늦으면 3시 시험에 배정될 확률이 높다는 소문이 있어 마지막 날 접수한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운명이겠거니 하고 과감히 둘째 날 매우 앞 번호로 접수를 마친 상태였다. 실제로 엄청 뒷번호인데도 1시에 배정된 친구들이 많았다. 마침내 결과가 나왔고 3시 시험인 2그룹에 배정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대 통대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졌고, 이대 붙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밥 먹듯 했던 것 같다.
  이대 통역과 시험은 토/일 양일에 걸쳐 진행된다. 토요일은 한중, 일요일은 중한 시험이다. 시험 유형은 메모리(지문 듣고 기억한 대로 도착어로 통역)와 문답(지문 듣고 3가지 질문에 대해 도착어로 답변)으로 나뉜다. 어쩌면 이대 시험은 매우 허무하다. 전체 시험이 5분 내지 10분이면 모두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분의 교수님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대 시험 준비는 매일 스터디 파트너와 흥미 있는 기사를 하나씩 골라와 읽어주고 메모리 하는 연습으로 했다. 대부분이 한중 메모리였다. 중한 메모리는 듣기에 문제가 없다면 모국어로 대답을 하기 때문에 좀 더 수월했다. 이 스터디는 꽤 즐기며 재미있게 했다. 골라오는 글들이 재미있고 상식을 쌓기에도 좋았다.
  스터디 파트너와는 항상 케미가 잘 맞았다. 둘이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이야기도 잘 통했다. 그리고 친구는 이대 통대 번역과를 1 지망으로, 나는 통역과를 1 지망으로 했기 때문에 둘의 목표가 약간 달라 경쟁보다는 상부상조의 느낌이었다. 이 또한 공부하는데 큰 스트레스 없이 서로를 북돋아줄 수 있었던 부분이다.


운명의 외대 1차 시험과 이대 통역과 시험

1. 외대 1차 시험
  10월 21일 드디어 외대 1차 시험과 이대 통역과 시험이 다가왔다. 예전에 임용고시를 볼 때도 이 정도로 떨리지는 않았다. 전날 학원 뒤에 있는 조계사에 가서 뒤늦은 기도까지 하고 왔다. 시험 당일 마지막 순간까지도 1년 동안 만든 단어장을 계속 읽었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작년에 비해서는 무난한 주제들이었다. 특히 작문은 '제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교육 방법에 대한 본인의 생각(한중)'과 '공유경제의 발전방향(중한)'이라는 매우 평범한 주제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주제다. 그리고 공유경제 작문은 추석 연휴 당시 내가 스터디 멤버들에게 준비해 갔던 작문 모의고사 주제이기도 했다. 아는 문제가 나오니 더욱 떨렸다. 흥분한 마음에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요약에서는 로봇세(한중)와 중국 경제 위기(중한)에 관련된 문제가 나왔다. 대부분 시간이 모자라는 경우가 없다고 하는데 나는 칸도, 시간도 모자라는 것 같았다. 뒤늦게 남은 여백과 시간을 확인하고 내가 들은 것 중 상당 부분을 과감히 생략해가며 마무리를 지었다. 더 많은 것을 들었는데 다 쓰지 못해 아쉽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사'가 아니라 '요약'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생략하는 결단도 필요한 것 같다.
  외대 시험을 끝내고 나왔는데 다들 표정이 좋다. 모두에게 쉬운 시험이었다. 나중에 1차 시험이 끝나고 학원에서 들은 바로는 외대 교수님들이 작문 답안을 채점하면서 매우 천편일률적인 답안들이라고 이야기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홀가분하면서도 다들 잘 본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어쨌든 시험 당일엔 일단 외대 시험은 잊고 이제 이대 시험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이대로 향했다.


2. 이대 통역과 시험
  이대 앞 본죽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준비해 갔던 옷으로 갈아입고 시간이 되어 3시 시험에 배정받은 학생들이 우르르 대기실로 향했다. 내가 속한 조에서 나는 매우 뒷번호였기에 거의 2시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단어장을 살폈다. 전자기기도 없기 때문에 듣기 연습을 할 수 없어 이따 써먹을지 모를 단어들을 다시 복습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내 차례가 되었고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시험 진행요원이 시간이 없으니 들어가서 인사는 생략하고 퇴실할 때 문을 살살 닫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아마 쾅쾅 닫히는 문이라 시험에 적잖이 방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유의 사항을 듣고 드디어 입실한다.
  이대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교수님이 가운데 앉아계셨다.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앉자마자 수험번호와 이름을 이야기하고 바로 메모리가 시작되었다.
  오른쪽에 계신 교수님이 국문 지문을 읽기 시작하셨다. '미국 대표 장난감 회사인 토이저러스...'까지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스터디 파트너와 함께 메모리를 했던 지문이 똑같이 나왔기 때문이다. 스터디를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공부한 내용이 메모리로 나오면 어떡하냐고 이야기한 적도 있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되었다. 순간 너무 흥분해 앞부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고 곧 정신을 차려 연습 때 놓쳤던 부분을 주의하여 들었다. 지문을 읽어주시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나를 쳐다보기도 하셨다. 혹시 듣는 자세도 점수에 포함되는 것인가 하여 교수님을 쳐다보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곧 지문이 끝나고 바로 메모리를 시작했다. 흥분과 당황이 섞인 가운데, 연습 때 메모리 하지 못했던 부분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통역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역시 시험은 시험인지, 연습 때보다도 문장 구조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그 와중에 다행히 시험 전에 단어장에서 보았던 '키덜트족'이 나와 정확한 중국어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복습을 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메모리가 끝나고 곧이어 문답이 시작되었다. 두 교수님 모두 지문을 읽는 속도가 빨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문답은 '대형마트가 중소형 마트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앞부분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에 메모리가 끝나자마자 바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용이 약간 추상적이라 머릿속에서 구조화하기가 어려웠다.
  곧 지문이 끝나고 질문을 시작하셨다. 다행히 들었던 부분에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나왔고 그렇게 약 7분가량의 한중 시험이 끝났다. 감사 인사를 하고 일어나 의자를 넣고 문을 살살 닫아 달라는 이야기가 생각나 조용히 퇴실했다.
  옷을 다시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에 갔는데 기운이 싹 빠지고 진작에 스터디로 했던 내용인데 생각만큼 유창하게 한 것 같지 않아 불안했다. 외대 시험이 끝나고 나올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불안했지만 일요일 시험이 남았으니 그래도 포기는 말자는 생각을 하며 집에 왔다. 스터디 파트너와는 우리가 공부한 내용이 나왔다며 신기해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이튿날 다시 이대로 향했다. 친구들이 모두 전날 시험과 오전에 중한 시험을 마친 친구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고 오늘은 모국어로 답하는 날이니 어제보다는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전날과 같이 대기실로 향해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이 날은 단어장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전날과 달리 한 명의 결시생이 생겼다. 그리고 전날보다도 시험이 빨리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곧 내 차례가 되었고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계시던 교수님이 전날과는 달랐다. 별도의 수험번호/이름 이야기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메모리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한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제 자체는 무난했는데 숫자들이 많이 나와 최대한 디테일하게 기억하기로 했다. 어제와 같이 듣는 동안 계속 교수님의 눈을 보며 리액션을 했다. 지문이 끝나고 바로 메모리를 시작했다. 중간에 말이 약간 엉켰으나 최대한 많은 내용을 말하려고 노력했다. 
  곧바로 문답이 시작되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또한 전날 진행한 한중 시험보다는 평이한 주제였다. 나에게 쉬운 주제는 다른 수험생에게도 쉬운 주제일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빠른 반응을 보여 대답하자는 생각으로 뜸을 들이지 않고 속도감 있게 대답했다.
  마침내 모든 시험이 끝나고 스터디 파트너가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이대 정문을 나섰다. 정문을 나서며 내년 3월 2일 개강 날 이 자리에서 만나 같이 등교하자고 약속했다.



외대 1차 시험 결과와 2차 시험

  외대 1차 시험이 끝난 후 약 10일 뒤 결과가 나온다. 외대 1차 시험과 이대 시험이 끝난 후 학원은 약간 휑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반 친구들은 입시 자체가 끝났기 때문이다. 중앙대와 서울외대를 준비하는 친구들과 외대반 친구들은 계속 학원에 나왔다.
  면접 준비를 위해 모의 면접 스터디를 짜고 매일같이 시역과 시사/개인 질문 연습을 했다. 다 아는 친구들과 하는 면접 스터디인데도 최대한 실전처럼 한다 생각하니 꽤 긴장되었다. 더군다나 긴장하면 성조가 흔들리기 때문에, 이 부분 지적도 많이 받았다. 스터디가 끝나면 일단 그날 지적받은 부분을 고치는데 중점을 두고 복습을 했다. 1차 준비 때처럼 손으로 쓰는 공부가 없으니 집중이 조금 어려웠다. 그리고 곧 입시가 끝난다는 생각에 마음도 이미 홀가분해지고 있었다.


  얼마 후 외대 1차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지금이야 덤덤하게 합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1차 합격을 한 것뿐인데도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해졌다. 1차 합격 발표 이틀 후 바로 면접이 진행된다. 1차 발표 이후에도 평소와 같이 학원에 나가고 면접 스터디를 했다.
  면접 당일 일찍 집에서 나와 외대 근처 카페에서 남편과 대기했다. 다른 테이블에 2차 면접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많았다.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되어 대기장소로 향했다. 큰 강당에 모든 학과의 2차 시험 수험생들이 과별로 모여있었다. 본인 차례가 되면 방송으로 이름을 호명한다. 평소에 학원에서 인사만 하던 친구들과도 이날은 서로를 응원하고 긴장을 풀어주었다. 나는 수험번호가 매우 앞쪽이라 면접도 빨리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역시나 세 번째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학원 친구들의 응원을 받고 고사장으로 향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원래대로라면 2장이어야 할 종이가 3장이었다. 먼저 두 장은 한중/중한 시역이었다. 속도감 있게 시역해달라는 교수님의 요청을 듣고 바로 시역에 들어갔다.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약간 말도 꼬이고 같은 문장을 반복하기도 했다. 너무 속도에만 신경 썼나 보다. 시역이 끝나고 세 번째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중국어와 한글로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쓰여있었다. 이 사자성어가 중국과 한국에서 쓰이는 의미에 대해 각각 중국어와 한국어로 설명하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원숭이'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면접에서는 순발력도 평가 요소 중 하나일 텐데, 이 점에서 이미 점수가 깎였을 터였다.
  약 5초간 정적이 있었고 그 사이 내 머릿속에서는 '뭐라도 내뱉어봐'와 '그냥 모르겠다고 해'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결국 '아침에는 3개 주고 저녁에는 4개 주는 것, 아침에는 4개 주고 저녁에는 3개 주는 것이 사실 서로 같은데 이러한 꾀에 속는 것'이라는 아주 원초적인 답변을 하였다.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감이 약간 떨어졌다.
  그리고는 남자 교수님께서 '화웨이에서 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 통번역이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하셨다. 나는 특히 IT업계에서 매우 전도유망할 것이라고 대답하며 일할 적 경험을 들었다. 대답이 끝나고 수고했다며 나가도 좋다고 하셨다. 인사를 하고 의자를 넣고 고사장에서 나왔다.
  뭔가 약간 찝찝했다. 면접 스터디에서 각종 시사 문제를 다루었고 개인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연습했는데(심지어 19차 당대회 내용도 다 외웠는데...), 개인 질문이 하나뿐인 것도 약간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들으니, 사자성어가 문제로 나올 경우 시사 문제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자 차차 '그래도 합격하겠지'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나는 중앙대와 서울외대는 응시하지 않을 예정이고 만약 외대 이대 둘 다 떨어지면 재수를 하겠다는 생각이었기에, 이 날로써 올해 입시 준비는 끝났다. 기대와 불안을 느끼며 2주를 기다렸다.



외대 불합격의 충격

  외대 최종 발표날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출근하는 남편에게도 툴툴댔다. 남편은 1년간 수험생의 예민함을 잘 알고 있어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출근 후에는 초조해하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계속 사랑의 문자(?!)를 보냈다.


  예정된 2시 외대 통대 사이트에 합격자 발표 공지가 올라왔다. 수험번호와 생년월일을 바탕으로 조회를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작년에 보았던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문구가 떴다.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 첫 목표였는데 외대에 떨어졌다고? 허무함과 슬픔에 휩싸여 이내 펑펑 울었다. 엄마, 아빠, 동생, 남편 그리고 학원 선생님께 차례로 불합격 소식을 알렸다. 최대한 담담한 척을 하며..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이대가 남았으니 낙담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내 주력은 그래도 외대였는데, 이대에 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재수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하고 처참했다.
  계속 집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스타벅스로 향했다. 남편에게 우울함을 호소했다. 남편은 계속 나를 격려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문득문득 외대 불합격의 슬픔이 밀려왔지만 다음날이 바로 이사였기 때문에 이대 발표 전까지 며칠의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이대 발표를 며칠 앞두고 부산에 있는 막냇동생 네 집으로 향했다. 이듬해 1월 약사고시를 앞둔 동생이 같은 수험생으로서 많은 위로를 해주었다. 낮에는 혼자 동생 집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절에라도 다녀올까 싶었다. 범어사를 찾아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외대 합격 소식을 듣고 편한 마음으로 이대 발표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외대에 떨어진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이대 발표를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곤욕이다.  


  또다시 살 떨리는 합격 조회의 날이 다가왔다. 동생은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고 나는 아침 8시부터 계속 이대 통대 사이트를 새로고침 했다. 사실 새벽에 몇 번이고 잠이 깼는데, 그때 마다도 합격 조회 글이 혹시 올라오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픈 매도 빨리 맞아버리고 싶었고 이 긴장되는 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지자 합격자 발표 글이 올라왔고 정말 손을 덜덜 떨며 수험번호와 비번을 입력했다.


  응? 축하?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계속 다시 읽었다. 합격인 거다. 광광 울어버렸다. 긴장도 풀렸고 합격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제일 먼저 학교에 있을 부산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엉엉 울며 합격 소식을 전했다. 부산에 와있는 동안 동생도 불안했을 것이다. 동생도 기뻐하며 어서 집에 전화를 해주라고 했다. 다음으로 남편에게 전화했다. 역시 엉엉 울며 이대 합격 소식을 전했다. 남편도 운 것 같았다. 얼른 집에도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바로 아빠에게 전화해 합격 소식을 전했다. 엄마, 아빠도 내심 불안했나 보다. 외대에 떨어지고 나서 이대가 있으니 낙심 말라고는 했지만,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공부하겠다는 딸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아빠도 크게 기뻐해 주었고 얼마 후 엄마가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또 눈물이 났다. 엄마도 울었다.
  이대 발표 후 며칠이 지나도록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아침마다 다시 합격자 조회를 했다. 나와 함께 공부한 친구도 1 지망이었던 번역과에 합격했다. 이대 시험 둘째 날 정문에서 헤어지며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17년 한 해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목표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남편에게 미안할 정도로 모든 일의 1순위는 통대 입시였다. 남편은 나를 위해 회사에까지 들어갔다. 프리랜서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남편이 남들보다 일을 2배로 해가며 내가 편히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런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발전하고 싶다.
  통대 입시를 준비하다 보면 수많은 쟁쟁한 실력자들을 만날 수 있다. 나처럼 3년 정도의 유학은 '유학파'라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중국어만 보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한국어도 중요하며 각자의 강점이 있기 때문에, 유학 기간이 짧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나는 내 강점을 믿고 과거의 경험들이 좋은 시너지를 내줄 것이라고 믿는다. 통대 입시를 이겨낸 모든 친구들 존경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