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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Sep 04. 2019

통대 입학 전, 버려야 할 몇 가지 환상

통대 입학 후 깨닫게 된 몇 가지

  일반적으로 국제회의 통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통번역대학원을 간다. 별도의 공인 시험이나 자격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통대 졸업장을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증처럼 여긴다. 물론 통대를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통역을 할 수 있다. 동시통역은 어렵겠지만, 순차 통역은 실제로도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통역 공부를 하기 위해 통대 진학을 결심했고, 나름의 노력과 일정 수준의 운 덕분에 통대 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입학하고 첫 학기를 다니던 때 '아 실제로는 이렇군...'하고 느꼈던 몇 가지가 있다. 여기서 느낀 것들이 꼭 실망한 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보다는 합격의 기쁨에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진지한 자세로 내가 하는 공부를 이해하게 되었고 진정한 통대생의 마인드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편이 맞다.


늘 간식이 필요한 우리

1. 들어가자마자 뭔가 내가 몰랐던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자. 아마도 내 상상 속에 새로운 배움은 동시통역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동시통역은 2학년 때부터 배우기 때문에, 첫 학기에는 아직은 새로울 것이 없다. 1학년은 순차통역 중심의 수업을 해서 처음엔 입시 준비할 때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학기 수업에는 어떤 새로움이 있을까. 바로 교수님들의 현장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실제로 현장에서 통역하셨던 텍스트를 가지고 통역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실전 통역 이야기, 그것도 내 전공 언어의 통역에 대한 이야기는 통대 수업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귀한 강의이다.  


발표도 꽤 많은 통대 수업

 2. 외국어만 잘하면 될 거란 생각을 버리자. 사실 이는 통대 입시를 준비하면서도 어느 정도 깨닫긴 하는 부분이다. 통대는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모국어 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갈수록 크게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통대에 합격하고 나면 '내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았다'라고 또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통역 공부를 하다 보면, 외국 생활이 길어 애초부터 진짜 모국어라 할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친구들도 많고(이럴 때는 일단 머릿속으로 숫자를 셀 때 어떤 언어로 세는지를 가지고 모국어를 판단하곤 한다), 모국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느 순간 외국어도 안되고 모국어도 안 되는 일명 '0개 국어자'가 되는 어이없는 경험을 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확실히 잡는 것이 절실해진다. 물론 둘 중엔 모국어를 잡기가 상대적으로 쉽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난 모국어가 확실하니 외국어만 파면되겠다는 발상은 위험할 것 같다. 통역 연습도 중요하지만, 모국어든 외국어든 좋은 글 많이 접하며 순수한 언어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3. 정돈된 텍스트만 통역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자. 처음 통역 수업을 듣다가 '이게 뭐지......' 했던 순간이 여러 번 있는데, 바로 준비된 통역 자료가 (한국어든 중국어든) 문법적으로 이상한 문장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끝맺음도 이상하고 단어도 이상하고 이걸 내가 통역해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했다. 내 통역이 안 나오는 것을 원문 탓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통역 현장에서는 항상 정돈되고 문법적으로 완벽한 것만 통역할 수는 없다. 서면으로 쓰인 원고에도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있는데, PT 원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구어체로 실시간 발표하는 내용을 옮기다 보면 연사가 문법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수 없다. 이 얘기하다가 갑자기 저 얘기를 하기도 한다. 통역의 과정이 연사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거쳐 재구성하여 전달하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어떤 자료든 겸허히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쉽게 풀 수 있을까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어쩌면 첫 학기에 얻은 큰 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첫 학기 개강날

4. 입학만 하면 통역일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란 환상을 버리자. 이건 어쩌면 나만 가졌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만 일이 안 들어오는 것일 수도 있다. 입학 전에는, 입학하고 나면 학업과 일의 비율을 어떻게 잘 관리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심지어 입학하기 전보다도 일이 없다. 처음엔 이것 때문에 조바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행사 통역 요원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수업을 빠지면서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주말이나 공강을 이용해 경험해보는 것은 좋은 것 같다. 사실 내가 열심히 일을 구하지 않는데 통역일이 저절로 생길 리 없다. 특히 나처럼 아직 통대 재학 중인 아마추어에게 '와 주세요'하고 러브콜 보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대신 그 시간에 텀 정리도 하고 책도 읽고 마냥 놀면서 보내지 않았으니 학생답게, 학생다운 시간을 보낸 것에 충분히 만족할 줄도 알아야겠다. 그리고 공부만 해도 되는 상황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상황인지도. 얼마 안 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보면 일도 다 때가 있었다. 하고 싶을 땐 없다가 어느 순간 일이 몰려오는 그런 경험. 일단 학교 다닐 땐 학교 수업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


5. 갑자기 통역 실력이 오를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자. 입학 당시에는 설렘과 기대가 최고조일 때이기 때문에 '아 2년 뒤면 졸업을 하게 될 텐데, 매 순간 변화가 눈에 보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통대 입학해도 똑같다. 확실히 입시 때 보다 바빠졌고 해야 하는 임무(과제)는 많아졌다. 그래도 성장은 점진적이다. 하지만 제자리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 통대 들어와서 노트 테이킹 했을 때, 입시 때보다 개선된 것이 없는 것 같아 속상했다. 그런데 내 실력이 늘었나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니, 어느 날 생각보다 얼마 적지 않았는데도 기억으로 꽤 커버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아직 기호화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것과 가끔 내가 쓴 노트 테이킹을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는 여전하다. 확실한 것은 오늘 공부했다고 해서 실력이 반드시 느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 실력은 반드시 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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