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온전히 육아 전담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내 전 직업들을 나열하면 방송작가와 콘텐츠 에디터이다. 방송작가로는 8년을 일했고 콘텐츠 에디터로 4년을 일했다. 처음 방송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방송국에서 일하던 방송작가 선배 때문이었다. 한 달에 꽤 많이 번다고도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며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할 때 나름 인정받는 그 모습이 내겐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사실 전공은 소설이었지만 신춘문예라는 커다란 벽 앞에 늘 미끄러졌다. 순수문학의 길은 어렵구나. 난 문학도는 아닌가 봐. 그렇게 내 목표였던 꿈이 일그러졌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그 선배는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선배들과 잘 지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친한 언니 덕에 나는 MBC 저녁방송에 출연하게 됐다. 끼 많고 말 잘하는 대학생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내가 끼가 많았던가? 싶었지만 발표하는 걸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터라 하겠다고 용기를 냈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긴 하지만(그 프로그램도 없어졌다), 방송 촬영하러 갔던 그날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그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는 나랑 친한 선배의 친구였는데, 통화하면서 간단하게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촬영 일자와 방송 내용, 촬영 의도 등을 상세하게 적은 메일을 보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촬영구성안이었다. 꼼꼼하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 가에 대해 육하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진 내용이었고, 그 안에는 함께 촬영할 출연자들과 메인 주인공이 적혀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셀럽이나 가장 핫한 운동선수들을 응원하고 팬으로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성덕이 될 수 있는(?) 저녁방송 코너였다. 나랑 전화를 했던 그 작가는 아마도 막내작가였을 것이고, 촬영을 마치고 내게 따로 전화를 해서 분량을 늘리고 싶으니 다음에도 또 출연해달라고 했던 사람은 메인작가님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그 방송 출연을 끝으로 방송작가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15분짜리 분량의 꼭지 코너도 하루 종일 촬영해 일주일 안에 후다닥 만들어낸다는 걸 방송작가가 된 후에야 깨달았다. 당시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여의도에서 제작진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일찍 여의도로 향했던 나는 여의도의 랜드마크였던 MBC 건물 앞에서 제작진 차를 탔다. 차 안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학생 2명이 먼저 타고 있었고 시커먼 패딩점퍼를 입은 PD님과 촬영감독, 조연출이 차에 촬영장비와 함께 구겨타고 있었다.
비몽사몽이었지만 방송 출연을 한다는 것에 들떴던 나는 몹시도 신났다. 두 남학생들도 건너 건너 아는 사이라 촬영이 모두 처음인 우리는 모두 초짜였다. 촬영장에 도착한 우리는 갑자기 셀럽에게 줄 선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선물을 만들러 간 곳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딸도 출연이 결정됐다.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너무 평이한 대화들이 오고 가서인지 촬영감독과 PD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우리 곧 만날 텐데 처음 본 사이겠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들 좀 잘해봐요~ 평소에 말 잘한다고 소문난 분들이라고 들었는데~! 긴장 풀고 편안하게 대화를 좀 해봅시다~!"
솔직히... 처음 봤는데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누겠어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비교적 제일 많았던(?) 내가 총대를 맸다. 어쨌든 우리는 좋아하던 셀럽과 함께 데이트도 하고 선물도 주고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니까. 사실 촬영구성안을 받았을 때 나는 그 셀럽에 대한 사전조사를 무진장했다. 우선 진짜 그 셀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회가 없어서 못 만나는데, 이렇게 주어졌으니 내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덕이 되어보자고.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찾아보고 팬심을 뿜뿜 최면을 걸듯이 쏟아부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쳐가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분위기가 좀 더 편해지면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과 나는 모두 그 공간에서만큼은 팬심이 들끓는 덕후였다. 분위기가 바뀌자 PD님이 이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미 촬영구성안 안에 있던 인터뷰지를 달달 외웠던 터라 한 사람씩 앉아서 인터뷰 촬영을 마쳤다. 나는 제일 마지막에 촬영을 했는데, 앞선 친구들 덕에 편안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물 제작하고 인터뷰까지 촬영하고 나니 본격적으로 셀럽과의 시간을 보내는 촬영이 시작됐다.
그 셀럽은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같이 운동을 하는 것으로 그 추운 겨울날 청소년 팀과 같이 했던 게 기억난다. 난 촬영하다가 살짝 삐끗해서 넘어졌는데 넘어진 게 너무 부끄러워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나를 보던 셀럽이 박수를 쳐주며 몸 풀기를 같이 해주고 청소년들과 으쌰으쌰 해가면서 추운 겨울 촬영을 마쳤다. 깨알 애드리브를 잠깐 쳤는데, 다들 웃어서 즐겁게 촬영이 마무리됐다. 촬영 감독님이 내게 꼭 방송을 하라며 엄지 척을 해준 걸 끝으로 촬영이 끝났다. (촬영이 다 끝난 후에 그 선수는 사인도 해주고 셀카도 찍어줬다^^)
촬영하고 대략... 5일 뒤쯤이었나, 드디어 방송이 됐다. 분량이 어차피 적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15분 동안 나는 방송 분량의 절반 이상을 출연했다. 인터뷰도 거의 다 나왔고 내가 쳤던 애드리브도 모두 방송되었다. 응??? 그리고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추후에도 방송 출연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어벙벙했지만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일단 쑥스러웠고, 내 얼굴이 전국방송에 나가는 건... 왠지 무섭기도 했다. 체질이 연예인은 못되겠구나 싶어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가끔 이때 연락하게 된 작가님과 안부를 주고받는데, 지금도 물어본다. 너의 끼는 잠재되어있다며, 뭐든 했으면 좋겠다고. 강렬하고도 짧았던 나의 첫 방송 출연은 추후에 내가 방송작가가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말할 수 없다. 부끄러운 것이 일 번이고 이미 그 프로그램이 종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처음 방송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촬영을 하게 되는지 경험해보게 된 건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촬영감독님과도 친해져 방송작가로 일할 때 도움도 얻고, 도움도 주고 하면서 좋은 동료가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유튜브나 이런 것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 처음 사람 덕질을 해봤으며 촬영 시스템이 어떻게 진행되는 가를 볼 수 있었던 나의 강렬했던 첫 방송 출연에 대한 기억은 여기까지.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열심히 준비하면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대충 했더라면, 혹은 촬영하는 주인공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애드리브도, 인터뷰에 대한 답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준비하는 자에겐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아기 엄마로 전업주부가 된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다.
누가 알아! 어떤 식으로든 또 출연하게 될지?
핑크쟁이김작가
방송작가로 8년, 콘텐츠 에디터로 4년 도합 12년 넘도록 계속 글을 써오고 있는 초보 주부 겸 프리랜서 작가.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하고 남편 밤톨군과 낚시를 하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중. 남편이 주로 낚싯대를 점검하고, 아내는 필요한 짐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 아기가 좀 더 크면 같이 낚시방랑가족이 되는 게 꿈인 낚시꾼이에요 :) 아기자기한 것을 사랑하는 핑크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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