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삿값이며 방치된 내 영혼의 언저리

오래된 짐, 정리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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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한다. 풀고 풀고 묶고 묶고 열심히 그러모은다. 웅크린 것을 일으켜 내장까지 다 파헤쳐서 잘 살피고 다시 잘 담는다. 무언가 옆으로 치워지고 저쪽으로 버려진다. 덩달아 내 인생이 조금씩 지워진다.


아주 오래된 상자를 열어보고 곧장 마음이 무너진다. 니콘 F4, 카메라가 그대로 어제처럼 담겨 있고 필름이 꼭 오늘처럼 장전되어 있다. 어디일까 누굴까 어떤 풍경을 남기려고 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왜 다 찍지 못하고 결심을 중단했는지 잘 모른다. 인생의 마지막 셔터, 그 순간 하늘은 어땠는지 구름은 어땠는지 내 눈은 어땠는지 감추어둔 비밀처럼 감춰지고, 봉인이란 말이 불쑥 봉인에서 풀려났다.


사용하지 않은 필름 ‘프로이미지 100’ 한 통 남아 있다. 유통기한 지난 필름으로만 찍어서 사진 전시회 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죽은 곤충, 장수하늘소쯤을 그렇게 하였듯 시간이 멈춰진 그대로 다시 뚜껑을 덮는다. 묘비도 없이. 트더진 침묵의 내장을 봉합하듯이. 이젠 더 어둡고 무거운 시간을 지내야 하는구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생각났다. 코끝이 시큰하다. 생각해 보면 사진 참 많이 찍으며 여기저기 쏘다녔다.


또 다른 카메라 박스는 10초 정도 쳐다보다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치운다. 그 카메라는 내 인생 첫 번 째 DSLR, 어쩌다 코뼈가 부러져서 지금은 자리를 옮긴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나오자마자 두 장의 신용카드를 긁어 겨우 충동구매완료. 당시엔 아주 좋았던 니콘 D600 디지털카메라였다. 벌써 20여 년 전이니까 나처럼 늙어있을 게 빤하다. 열어보면 정말 마음 아플 거다. 이 새벽에 우리 둘 다 조금씩 더 늙을 거다. 막막한 그리움과 짙은 회한이 노화의 원인이니까.


십여 년 가까이 열어보지 않은 상자들. 고스란히 나다. 나의 근삿값이며 방치된 내 영혼의 언저리다. 몇 년 동안 쌓아만 두었던 물건들. 한 때 중요했지만 지금은 버려야 할 정처 없는 시간.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들도 많고, 내가 돌려줘야 했던 것들도 많고 여기에 있다가 없는 것들은 모두 다 내가 아직 돌려받지 못한 것, 아직 되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생각했다. 갑자기 나를 더 잘 모르겠다. 오래 끊었던 담배를 다시 깨물고 앉아서 밤으로만 점철되는 하늘을 쳐다보는데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오늘 다 버리지 말고, 오늘 다 정리하려 하지 말고, 오늘 다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 생각하고, 내일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내일 또 서러워지면 버리지 말자. 조금씩만 버리자. 지금 다 버리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들은, 우리 모두에게, 모두와 함께, 버려진다. 사라진다.


나는 아직 소망이 하나 있다.

그 하나 남은 소망을,

지금 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부디,


그대의 영혼에 평온이 깃들기를!


23.5.7. 0305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