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처갓집이 생겼다.

<호주에서 9년 살았다. #11>

by 하루미래

우리 부부는 요즘, 변화에 적응 중이다.
30년 가까이 살아오던 한국이라는 큰 울타리를 벗어나
이제는 호주라는 낯선 울타리 안에서
하루하루 익숙해지려 애쓰는 중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시드니에선 ‘가까운 거리’로 여겨지는 걸 보면,
땅도 다르고 기준도 다르고,
무엇보다 삶의 결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건
결코 단점만은 아니었다.
우리 부부에게 시드니 생활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경험'이라는 선물 덕분이다.


한국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이곳에선 자연스레 시작하게 됐다.
아내는 네일 아트 일을 다시 시작했고,
나는 페인트 롤러와 붓을 들었다.


살면서 내 손에 그런 도구가 쥐어질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막상 해보니 할 만했다.

처음은 늘 낯설고 어렵다.


페인트칠도 그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인 ‘시간’은
결국 모든 걸 익숙하게 만든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도구와 일상이
어느 순간 편안해졌고,
마음에도 작은 여유가 생겼다.


우리 부부의 삶도 그렇게 바뀌었다.

각자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더 너그러워졌고,
그 여유가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이 지긋한 분들과 페인트 작업을 했기에
일이 끝나면 각자 조용히 흩어졌지만,
아내가 일하는 네일숍은 달랐다.
원장님을 포함해 직원들 모두
워킹홀리데이를 온 또래들이라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특히, 시드니라는 낯선 공간에서 만난 인연이라 그런지
더 깊고 빠르게 친밀해졌다.
아침이면 함께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근처에서 함께 밥을 먹고,
집도 근처니 자연스레 정도 생긴다.


무엇보다 다들 '비슷한 처지'였기에
공감대도 컸고, 우정도 금세 자랐다.
나는 함께 일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유쾌한 적응력 덕분에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면접을 같이 본 인연으로
네일숍 회식에도 참여하게 됐고,
어느 순간, 나는 직원도 아닌데
가장 편하게 적응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늘 그렇듯 하루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어, 마쳤어?”
“아니~ 마치기 10분 전에 에 데리러 와~”
“알겠어~”
“근데... 나올 때 운동복 말고, 옷 좀 입고 와~”
“엥? 왜?”
“그런 게 있어~ 나중에 봐~”


뭔가 수상했다.
속으로 ‘뭐지?’ 하며 대충 얼굴을 정돈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갖춰 입을 옷이랄 것도 없었지만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사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시끄럽게 챙기기보단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아내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밖으로 나서는데 마침 마스터 형님이 물었다.
“뭐 좋은 일 있어?”
내 얼굴에 미소가 잔뜩 묻어 있었나 보다.


네일숍에 도착하자,
동생들이 부산스럽게 맞이한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얼떨결에 자리에 앉자

오른손, 왼손에 한 명씩 붙어
갑자기 손을 케어해 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손은 마치 여자 손처럼

부드럽고 말끔하게 바뀌었다.


내일 또 페인트칠로 손이 더러워질 걸 생각하니
조금 웃겼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중 원장님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자, 이제 집으로 가자~”
“네?? 집이요?”
“응~ 오늘 우리 집에서 회식이야.”
“근데 제가 왜...?”
“오늘 이서방 생일이잖아~ 내가 챙겨줘야지!”

순간 얼어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주변 사람들은 그 반응이 웃겼는지
그저 웃고 있었다.


호주에 온 지 100일 남짓.
그 사이 이렇게 따뜻한 인연이

생겼다는 게 참 놀라웠다.


아내 덕분에 시드니에서

뜻밖의 ‘처갓집’이 생겼다.


원장님 댁에 도착해
생일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웅장했다.
랍스터, 고기, 새우, 전복, 과일,
소주, 맥주, 와인, 그리고 막걸리까지.
생일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날 우리는 정말 많이 웃고,
많이 먹고, 진심으로 연결된 느낌을 나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느냐.
변화가 없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변화는 언제나 두렵다.
하지만 그 안에 삶의 진짜 선물이 숨어 있다.
오늘, 나는 그 변화를 통해
생일날 처갓집이 생기는 기적 같은 하루를 경험했다.


정말이지, 즐거운 하루였다.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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