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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Dec 25. 2024

사유한다는 것

악의 평범성

기록을 확인하니 4년 전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은 것이.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아동학대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기피하는 심리상태를 연결시켜 자아성찰적인 감상평을 남긴 것이   

  

초파리를 무심히 죽일 수 있는 ‘나’는 아이히만과 다른 사람일까?

내가 그 시대 독일에서 태어나 아이히만 자리에 있었다면 달랐을까?     

2020.6.12.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한('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붙잡혀 재판받을 당시 한나 아렌트는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이 재판을 참관했다. 개인적인 관심이 더해져서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에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공무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아이히만. 마지막 순간조차도 상투어를 내뱉을 뿐(“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뉘우침도 후회도 없었다.   

   

이 마지막 말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죽음을 앞두고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며 그의 기억이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다고 말한다.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고.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고.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아이히만의 말과 달리 악한 존재였는데 이 악함은 멍청함과도 연결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멍청함은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히틀러가 지시한 ‘최종 해결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이히만이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위에서 온 명령에 (지독하게) 충실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사람)을 죽음으로 이송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의 말>85p


4년 전 기록에서 자아성찰적인 시선으로 책을 읽어냈으나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맞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는 타인을 바라보며 사유하지 못하는 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 안의 아이히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미안한데 밥 그만 먹을게.

엄마, 미안한데 오늘 학원 안 가고 쉬고 싶어.

엄마, 미안한데.....     


소리는 ‘미안한데’라는 말을 자주 덧붙인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내가 소리에게 엄격한가, 억압하나 근심했다. 소리에게 말할 때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어때? 할래? 같은 청유형으로 강요하지 않고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해도 소리의 ‘미안한데’ 사용이 계속되자 어느 날은 "네가 좋은 대로 결정하는 것이 엄마에게 미안할 일은 아니야. 사람은 자기가 좋은 대로 결정해야만 하는 존재야."라고 진지하게 말하기도 했다. 싱긋 웃으며 응, 이라고 소리는 대답했으나 ‘미안한데’라는 말의 사용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소리가 ‘미안한데’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를 알게 됐다.

     

“엄마, 나는 공감의 F인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T야.”   

  

‘미안한데’라는 말의 사용은 내가 엄격해서도 강압적이어서도 아니었다. 소리가 공감의 F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소리의 상냥함이었다. 따스한 심장을 가지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감정형의 소리.

     

내 속에서 헤매다가 소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길을 찾았다. 나르시스가 꼭 아름다움에만 취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못남에만 취하는 것도 타인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일상을 파괴하려 드는 것,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자 멍청함이라고 표현한 것. 이 지점에 분노가 깃드는 거겠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한길사

<한나 아렌트의 말>    한나 아렌트.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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