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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Jan 29. 2024

조건에 갇혀버린 건 아닌지

맥북에어는 2008년도에 출시되었다. 내가 바라던 노트북의 결정체였다. 작고, 얇고, 가볍고, 배터리 오래가고, 퍼포먼스 좋고, 무엇보다 멋진 디자인.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바로 구입했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문제와 만났다. 그때도 100~200장 되는 문서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한글키에서 빠른 타이핑이 되지 않았다. 키보드 입력속도와 모니터에 글자가 구현되는 속도 사이에 약간의 딜레이 현상이 생겼다. 실시간으로 타이핑 글자가 모니터에 나타나지 않고 살짝 지연되는 현상을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수십장의 문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수백장 문서에서만 발생하는 지연현상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결국 맥북에어를 2달만에 되팔았다.


그 짧고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그 뒤로 노트북을 살 때마다 맥북을 사려고 고민했으나 계속해서 윈도우기반 노트북을 샀다. 작년 가을, 베어라는 메모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맥미니 중고를 급히 구입했다. 그때부터 맥의 세계에 빠졌다. 12년째 사용중인 스크리버너도 맥버전으로 다시 구입했다. 같은 프로그램인데 맥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은 다르다. 작은 주관적 느낌인지, 큰 객관적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사용하면서 경험하는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만큼이나 크다. 군더더기없는 오직 효율적인 작업에 몰입하게 만드는 맥의 인터페이스가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아이폰, 아이패드와의 연동성은 기가 막히다. 에어드랍으로 파일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 이제는 익숙하지만 그때마다 마법같은 감동을 느낀다. 구글드라이버, 드롭박스 등도 모조리 아이클라우드로 옮기려 준비중이다. 자유를 맛본 새가 다시는 새장 안으로 들어가진 않듯, 다시는 윈도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맥의 황홀한 세계에 빠진 나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꾼다. M2 맥미니, 맥북, 더 큰 4K 모니터 등을 갖추고 모션데스크와 쾌적한 책장을 만들어 새로운 작업 환경을 구축하고 싶다. 그렇게 더 나은 조건을 갖추면 일이 정말정말정말 잘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검색을 하고 검색을 하며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일은 하지 않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만 더 좋은 조건에 대한 관심이 간다. 오래전 사진에 입문했을 때,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을 때와 비슷하다. 더 좋은 장비를 갖추면 더 좋은 사진을 찍고, 더 자전거를 멋지게 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장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장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담배를 끊은 사람이 다시 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자꾸만 마음이 간다. 


조건을 중요시하는 태도의 문제는 취미생활이나 작업환경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때 누구를 만났더라면, 지금 직장을 그만두고 이런 일을 시작한다면, 다른 회사를 다닌다면, 다른 사람과 사귀었다면, 다른 부모를 만났더라면,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여자로 태어났다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내 통장에 돈이 10배만 더 있었더라면, 건물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멋진 비율과 비쥬얼로 태어났다면, 저런 부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 인간을 엮이지만 않았더라면... 등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 나은 조건이 되면 삶은 승승장구할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한 때 좁은 집에서 복잡하게 산 적이 있다. 넓은 곳, 멋진 공간에서 살면 나도 영화 속 근사한 집에서 우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집을 새로 지은 적이 있다. 왠걸, 여전히 지저분하고 물건은 아무곳이나 돌아다니고, 그전의 집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건 공간이라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라는 걸. 핸드폰을 최신형으로 바꾸고 싶은 것, 차를 바꾸고 싶은 것, 더 좋은 컴퓨터와 모니터를 구입하고 싶은 것, 더 좋은 집으로 옮기고 싶은 것은 다 비슷한 태도 같다. 조건을 더 좋게 바꾸어 삶을 더 좋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기대 조건과 실제 결과의 인과관계는 어떨까? 잘 모르겠다. 잘 모르기보다는 삶이 켜켜이 쌓일수록 조건과 결과는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다.


이 지긋지긋한 직장만 그만두면, 저 인간과의 관계만 청산하면, 멋진 사람을 만난다면, 성형 수술을 한다면, 좋은 대학에만 간다면, 통장에 10억만 입금된다면, 건강해진다면, 마음만 편해진다면.. 모두가 조건에 관한 생각들이다. 


작년 고등학교에 수업을 갔다가 한 학생과 질문과 대답을 계속 주고받은 적이 있다. 학생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 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자 등을 하겠단다. 그렇게 해서 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다면 그때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또 투자와 사업을 하며 돈을 더 많이 벌겠단다. 진짜 그렇게 해서 최고의 부자가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학생은 결국 돈을 벌만큼 벌고 난 뒤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대답하지 못했다. 학생은 끝없이 돈버는 과정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게 바로 조건을 갖추는 일이다.


나도 그 학생처럼 조건을 갖추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작업환경을 쾌적하게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거나 미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더 좋은 조건만 생각하면 장미빛 미래가 미소지으며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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