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지만 한국인으로 살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아버지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기개발의 개념을 일찍 터득하여 기어코 일본제국의 군인이 된 박정희같은 진로로드맵은 그에게 무척 낯선 인생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공중에 떠버린 인생이니 만주에 가야겠다고 할아버지는 결심했다.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 시대의 기회란 100억을 모으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음식과 몸을 뉘일 곳을 마련하는 것이 그 시대의 꿈이었다.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은 기회를 찾아 만주로 떠났다. 어떤 사람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죽이며, 어떤 사람은 척박한 억척같이 농사를 지으며, 어떤 사람은 물건을 팔며 삶의 기회를 키웠다. 1945년 할아버지와 함께 만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평생 소원은 자신의 집을 갖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집주인 선언을 상상하며 불안해하지 않는 삶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내집 마련은 녹록치 않았다. 아버지는 태어난지 75년째 되는 해에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60평 땅에 절반은 정원인 단층집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달며 흐뭇해하던 아버지는 자기도 이제 자기소유의 집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때늦은 자부심은 10년 동안 숨쉬다가 아버지의 육신과 함께 땅에 묻혔다.
삶에 대한 자부심은 종속적인지, 독립적인지 알 수 없다. 돈, 외모, 관계, 지위, 소유와 같은 조건과 형식에 따라 자부심은 생겼다가 사라졌다 하는 것인지, 진정한 자부심은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자생적으로 피어나는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음이 삶을 더 살게 하는 힘이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남긴 자부심의 흔적과 씨름한다. 아버지의 집 정원과 씨름했고 씨름하고 있다. 계절별로 온갖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지난 13년 동안 정원에 쏟아부은 돈은 최소 천만원이다. 데크와 디딤돌을 여러 종류로 시도했고 해마다 식물을 사서 심었다. 귀하다는 한국 야생화식재로 도배를 한 적도 있고, 페퍼민트, 세이지류의 허브를 시도한 적도 있다. 나지막한 다년생 식물뿐 아니라, 동백, 가죽나무, 배롱나무, 헛개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호랑이발톱나무, 장미, 주목과 같은 나무들도 심었다. 어떤 것들은 살고 어떤 것들은 죽었다. 주목과 같은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가죽나무, 살구나무, 헛개나무는 크고 무성하게 자라서 잘라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허망한 것은 초본류다. 초본류는 돈먹는 하마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잔뜩 사다 심으면 다음해, 몇 해 뒤에는 잡초로 변신했다. 겨울나는 다년생 초본류들은 99.9%가 죽고 남아 있는 것의 거의 없다.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 같다. 누구보다 식물을 잘 키우고 싶지만, 천부적 식물킬러의 운명을 타고난 자의 슬픔이다. 아버지의 자부심은 그렇게 변해갔다. 돈을 주고 산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상품인 원하는 식물은 시들시들하다 사라졌고, 30평 땅 여기저기에 적응한 잡초와 잡목이라 불리는 원하지 않는 식물은 기어코 살아남아 번성했다. 작년에도 200만원 가까이 식물을 심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정원이란 식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정원이란 선택과 배제의 결과다. 보고 싶은 것들과 보기 싫은 것들을 일정한 공간에 실현시킨다. 어떤 식물은 허리가 부러질듯 고통스럽게 뽑아내고, 어떤 식물은 갓난 애기 다루듯 애지중지 돌본다. 이게 뜻대로 되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편안하고 기막히게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가꾸는 사람과 조건과 환경의 다양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그 어떤 것도 똑같지 않다. 마치 삶과 비슷하다. 특정한 삶을 원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 삶. 올해 봄에 생각을 바꾸었다. 나의 정원에 잘 적응한 식물만 심기로 했다. 사서 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다시 말하면 옮겨심기다. 단어배치를 달리해서 새로운 문장을 만들듯, 문단배치를 달리해서 새로운 글을 만들듯 정원을 편집하기로 했다. 나의 정원이라는 환경에 완벽히 적응해서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린 식물을 이용해서 새로운 정원을 만드는 방식이다. 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글은 AI가 만들어낸 글처럼 공허하다. 투박하고 허접해도 나의 진실로부터 나온 글이 좋은 글이다. 세련되고 관심을 끈다고 해서 남의 생각, 남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쓰면 그건 나의 글이 아니다. 동의하고 공감한다고 해서 나의 생각인양 쓰는 글은 보고 싶다고 해서 식물을 사다 심는 것과 같다. 식물을 식재하는 것과 뿌리내려 내 정원에서 잘 살게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아무리 해도 죽는 식물과 아무리 해도 끝끝내 번성하는 식물은 인간의 고유성을 만들어지는 원리와 같다. 글과 삶은 닮았다.
인간은 식물과 같다. 특히 아이는 더욱 닮았다.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좋은 기질과 습관, 생각과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억지로 이식하기 힘들다. 어떤 것들은 이식을 통해 뿌리 내리고 자라고 어떤 것들은 죽어가는 식물들처럼 가능하지 않다. 어떤 것들은 없애려하지만 없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잊고 살아가지만, 어른도 아이, 식물과 같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잡초와 잡초 아님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애초에 정원이란 자연을 마당에 옮긴 것이고, 잡초도 자연의 일부,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연아닌가? 그런 점에서 잡초는 가장 자연다운 존재 아닌가? 정원 만들기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고 가만히 바라본다. 능소화, 수국, 국화, 찔레, 아이비, 비비추처럼 잡초답게 놀라운 생명력으로 자라는 식물 위주로 정원을 만들고 있다. 육아와 교육의 본질은 타고난 능력을 잘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작은 정원이라는 조건에서 잘 적응해서 자라는 식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보기 좋게 만드는 것, 그게 이제부터의 정원 가꾸기다. 육아, 교육, 삶, 정원 가꾸기는 닮았다. 글쓰기와도 닮았다. 의심하고 부정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과 믿고 인정하고 유지하려는 생각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다. 편집이라 부르든, 정원 가꾸기라 부르든, 자기개발이라 부르든 본질은 똑같다. 나만의 삶을 산다는 것은 고유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이식하려니 불편하고 힘들고 스트레스가 생긴다. 남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할때가 아니라, 나다움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때. 역설적이게도 그때가 타인에게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인정은 목적이 아니다. 인정은 결과다. 고유성의 결과다. 언제나 그렇듯 고유성은 자연스러움이라는 토양에서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식물과 같다. 삶의 자부심은 그런 잡초같은 식물에 피는 꽃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뽑아내려는 잡초가 자부심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정작 뽑아내어야 할 것은 잡초와 잡초 아님을 구분하는 편협하고 무지한 생각일지 모른다. 모르는 것을 싸잡아 잡초라 퉁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