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20대에 즐겨 부르던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가사다. 평소 때는 소설 채식주의자속 주인공처럼 숲속 그늘에 가려진 키작은 풀처럼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돌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새끼를 빼앗겨 미쳐버린 멧돼지처럼 물불 가리지 덤비고 엎어버리는 저돌적인 괴물이 된다. 사춘기시절 한 친구는 내가 사슴의 눈을 가졌다 했다. 작정하고 화를 내면 사냥꾼의 총을 맞아 목숨 걸고 점프하는 백두산 호랑이가 된다. 영락없는 프랑케슈타인이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화를 내면 아무도 못말린다고 했다. 분노의 기억이 몇 개 떠오른다.
군대에서 중대장에게 쩌렁쩌렁 고함치며 옳고 그름을 따졌다. 고문관 아니다. 표효하듯 소리지른 이유는 계급으로 말을 판단하지 말고 오직 말로만 판단해라는 절규였다. 중대장을 쩔쩔매게 하고 결국 나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넘어갈 때였다. 군생활 동안 딱 한 번 그렇게 화를 내었다. 제대로 화를 내고 난 뒤부터 군생활이 동아리 활동처럼 재미있었다. 군대 지휘관에게 고함지르며 덤비는 미친 졸병. 본노의 폭풍이 지나가고 내막이 알려진 후 난 중대에서 멋진놈으로 알려졌다. 그때 마음을 담아 소대원들이 내게 쓴 짧은 글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 그때 얼마나 목소리가 컸던지 대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무슨 일인지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옳고 그름을 따질 때는 널리 알리는 것이 좋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소리치는 나도 놀랄 정도다. 평소 때는 바람빠져 쭈글한 풍선이 내뱉는 말처럼 시들시들하지만, 작정하고 고함을 치면 반경 1km에 있는 사람은 나의 말을 뚜렷히 들을 수 있다. 강원도 양구의 DMZ처럼 조용한 곳이라면 더 멀리 들릴 거다. 춘천 102보충대 입소때 입소자들을 대표해 내가 경례 구호를 외쳤다. 수백명 중에 내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가장 컸다는 뜻이다. 나서지 않는 성격인데 그때 왜 내가 입소식 대표로 뽑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시들한 잡초가 낙락장송이 될 수 있고, 식물이 동물이 될 수 있고, 피식자가 포식자가 될 수 있고, 이 땅의 가장 미천한 자가 가장 높고 고귀한 자가 될 수 있다 믿는다. 말하고 보니 성경에서 얼핏 본 말과 비슷하다. 예수도 한 성격 한 것 같다. 성전을 엎어버렸다니까.
첫 직장 신입사원 때 다른 지역의 과장과 통화를 했을 때다. 옳고 그름을 지리하게 따지고 있는데, 과장이 대뜸 내게 “너 언제 입사했어?”라고 말했다. 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직급, 근속, 학력, 성별, 재산, 피부색깔, 입은 옷, 키, 손가락 길이, 머리카락 갯수 같은 논점과 상관없는 조건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장의 태도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화산처럼 분노를 폭발시켰다. 옆부서와 옆부서의 옆부서 직원들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넓은 사무실 1층을 내 고함소리로 채웠다. 군대에서의 절반도 안 되는 데시벨이었지만, 조용조용히 일하는 사무실이었던 탓 같다. 과장은 결국 사과했다. 통화를 마치고 부서 관리자에게 다가가 소리쳐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잘했다고 했다. 공식적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때 얼핏 깨달았다. ‘아. 이 사회는 화낼때 화를 내어야 하는구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겠지, 굳이 나설 필요가, 상대 마음 상하지 않게 좋게 말하면 문제가 잘 풀리겠지….라는 기대는 순진함, 아니 문제를 외면하겠다는 태도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항상 말했다. “화내지 마라, 너는 다 좋은데 한 번씩 폭발하는 것이 문제다. 남에게 상처주지 마라. 언제나 사이좋게 잘 지내라.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엄마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내가 만나는 세상은 화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무시하거나 그럴듯한 변명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사이비종교 공동체 같았다. 좋은 사람들의 믿음처럼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리원자력 발전소의 연료봉처럼 화가 꺼지지 않았다. 꺼지지 않는 불을 끄려고 애쓰지 말고 잘 관리하는 것이 현명하겠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잘 먹어도 힘이 없는 나이가 되니 화를 낼 힘도 점점 줄어든다. 무엇보다 잘못된 것을 보아도 관여하지 않는다. 웃어 넘긴다. 가장 큰 변화는 깜빡이를 넣지 않고 내 앞에 확 끼어드는 차를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다. 왠만하면 다 넘어간다. 에너지는 점점 줄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쓸 배터리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숟가락 들 힘도 없는 사람이 트럼프 관세 정책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걱정하며 정부에게 화를 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화를 내는 건 생명을 갉아먹는 행위다. 배터리가 훅 떨어진다. 그래서 언제 화를 내어야 할 지 잘 결정해야 한다. 나에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좋고 세상에도 좋을 때만 화를 내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를 만드는 화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화를 이용해야 한다. 화를 내지 않기는 어렵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화는 필요하다. 문제 많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분노가 사라진다면 인류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을 것이다. 삼일 전에 크게 화를 냈다. 지금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이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까 계속 생각중이다. 발단은 100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