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은 텅 비어 있다. 물질을 이루는 원자는 공허하다. 원자를 서울 크기로 확대한다면. 서울역 광장에 축구공만한 원자핵이 있다면 성남이나 일산쯤에서 먼지 크기의 전자가 돌고 있단다. 대부분 공간은 텅 빈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은 축구공 혹은 먼지와 같다. 기록으로 뜨문뜨문 전해지는 사료들 사이의 텅 빈 미지의 공간은 원자 구조로 이해하는 서울역과 성남 사이의 텅빈 공간만큼이나 광활하다. 이 텅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빈약한 상상이다.
1405년 중국 명나라때 ‘정화‘라는 사람이 수백척의 선단을 이끌고 해양원정을 나선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정화의 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실이지만 대부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중앙아시아 색목인이라 하니 정화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무슬림이었을 것 같다. 지금으로 치면 한국에 일하러 온 파키스탄 노동자를 부모로 둔 독실한 이슬람 교도에게 한국 정부가 해군참모총장의 지위, 외교권, 국지전 결정권까지 준 것과 비슷하다.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배가 25미터 전후였는데 정화의 본선은 120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250여척이 넘는 크고 작은 배로 구성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정화의 선단 모습은 어땠을까? 해안 수평선에 출몰한 상상 밖 풍경을 본 원주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정화의 선단은 3만명 가까운 중국인들을 태운 떠다니는 도시였다. 지금의 싱가포르, 페낭 같은 곳에 도착하면 그곳을 무역 거점으로 관리하기 위해 일부 중국인들은 정착했다. 그들은 여자 원주민과 결혼해서 대대손손 살아갔다. 중국인과 말라카인의 혼혈을 페르나칸 부른다.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마주치는 중국 문화의 주요 기원이다. 정화의 항해는 28년 동안 7번 이루어졌으니 단순 계산으로 21만명의 중국인들이 수많은 정착지를 스쳐간 것이다. 일부는 영구적으로 머물고, 일부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돌아간 중국인들은 그들이 머물렀던 곳의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백년 동안 남쪽의 따뜻한 나라에 대한 사실과 상상을 키워간 중국인들은 때때로 신세계를 찾아 남쪽 바다를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미스터 션사인의 첫장면은 강화도 광성보 전투다. 그때 조선은 최악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만주, 러시아, 일본을 향했고 유진초이처럼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다. 19세기는 대기근의 시대였다. 중국도 대기근으로 1천만명 넘는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참혹한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중국인들이 싱가포르, 페낭 등지로 이주했다. 광동성, 복건성, 하이난 등의 남쪽 출신들이 많았다. 매년 수만명의 중국인들이 생존을 위해 싱가포르와 페낭의 부두길을 비틀거리며 걸어다녔다. 남자는 쿨리, 여자는 삼수이라 불리는 중국 노동자들이다. 남자들은 주로 부두의 하역일을, 붉은 머리수건을 두른 여자들은 싱가포르 마천루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 벽돌을 머리에 지고 날랐다. 이들 중국인 노동자들이 싱가포르를 만들었다.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을 찾았을때 의문이 들었다. 싱가포르 인구의 70%는 중국인이고 중국인이 싱가포르 역사의 주역인데 왠 차이나 타운? ‘한국의 코리아타운‘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1819년 싱가포르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한 래플스경은 서로 다른 민족이 싸우지 않도록 각 민족들이 살아가는 구역을 정했단다. 기근을 피해 배를 탄 중국인들은 싱가포르와 페낭의 차이나타운에 정착했다.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은 싱가포르 역사의 발원지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과 싸우며 일했던 중국 정착민들은 싱가포르 역사 그 자체다.
싱가포르는 중국인 70%, 말레이인 20%, 인도인 9%, 기타민족 1%가 살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말레이지아 연방이 된 싱가포르는 1965년에 강제 독립을 당한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지아 연방정부에게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든 민족을 평등하게 대하기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연방정부는 말레이인 우선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 독립하라고 싱가로프에 요구했다. 마시고 먹을 것조차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싱가포르는 눈물을 삼키며 생존이 위태로운 원치 않는 독립을 했다. 배부른 차별보다 배고픈 평등을 원했던 것이다. 싱가포르 중심가에의 전쟁기념공원에는 ’Civilian War Memorial’탑이 있다. 모양, 크기, 높이가 똑같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탑인데, 각 기둥은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기타민족을 의미한다.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민들은 차별없이 똑같은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탑이다.
싱가포르는 첫 배낭여행때 처음으로 밟아본 외국 땅이었다. 27년만에 싱가포르에 왔다. 이제서야 싱가포르가 어떤 곳인지 조금 알 것 같다. 12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는 축구공 크기 원자핵과 먼지만한 전자 사이의 텅텅 빈 공간에 무엇이 가득 차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인지조차 못하는 무지였다. 싱가포르가 왜 이렇게 번영하게 되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차별하지 않는 정신이다. 싱가포르를 생각하면 한국이 걱정스럽다. 민족, 국가, 외모, 스펙, 재력, 직업, 권한 등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생각이 점점 굳은 상식이 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이유야 무엇이든 차별이 지배하는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멸망한다는 사실을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직업이 차별의 진원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