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첫 배낭여행 때 ‘게스트하우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카이로에서 런던까지 3개월의 여행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행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공간.
루부르 박물관보다,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예루살렘보다, 크레타의 올리브밭보다,
프라하의 카를교보다, 드레즈덴의 맥주보다, 소피아 대성당보다, 시나이산 일출보다
게스트하우스가 더 멋진 여행지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진짜 여행을 했다. 사람들을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스스로를 돌아봤고, 배우고 자랐다. 문익점처럼 게스트하우스라는 씨앗을 가지고 첫 여행에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는 여행 그 자체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난생 처음 해외에 나가 밤 12시에 카이로에 도착한 날의 첫 게스트하우스를 잊지 못한다. 체크인하니 낯선 외국인들만 그들의 편안한 집처럼 여기저기 뒹굴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비스듬히 아랍인처럼 누워 시샤(물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불편했다. 모두가 나를 쳐다봤고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택할 수 없었다. 낯설고 불편한 게스트하우스를 견뎌야 했다. 앞날이 암담했다.
카이로의 여기저기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게스트하우스 문화가 점점 익숙해졌다.
3개월 동안 여러나라의 수십개 게스트하우스를 경험했다. 낯섦과 불편함의 게스트하우스는 익숙함과 편안함의 공간이 되었다. 처음 만난 낯선 여행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도와주는 인류애를 게스트하우스에서 배웠다. 한국에도 멋진 게스트하우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2013년에 달게스트하우스를 열었을때, 이 일은 나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베딩을 하며 행복을 느꼈다.
손님의 체크인을 기다리며 내가 여행을 앞둔 것처럼 설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눌때는 내가 여행을 떠난 것인지,
그들이 여행을 온 것인지 헷갈렸다.
한 참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할 때 마음 속으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가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게스트가 있었는데,
저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자신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왔을때도
변함없이 같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아이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아이에게,
“여긴 내가 너만할 때 왔던 곳이야….”
라고 말해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코로나도 터지고, 달게스트하우스는 폐가가 되었다.
오래오래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싶은 꿈도 사라졌다.
재작년부터 수리를 시작했고, 서점을 하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다시 할 가능성은 0%였다.
작년 초에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게스트하우스 등록면허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휴업을 했고, 폐업예정이라 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일자가 지났기 때문에 폐업과 상관없이 등록면허세를 내어야 한다고 했다.
억울한 마음으로 지방세를 납부했다.
처음에는 서점만,
그 다음에는 서점인데, 게스트하우스도 하기로 했다가,
그 다음에는 게스트하우스인데, 서점도 하기로 하는 것으로 컨셉을 바꾸었다.
작년 초에 울며겨자먹기로 낸 것 건 하늘의 큰 뜻인 것 같다.
어쩌면, 어쩌면,
옛날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옛날에 옛날에,
달게스트하우스에 왔던 어린 아이가 커서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
옛 기억을 더듬어보는 공간으로 존재하는 꿈.
5년 정도만 유지하면 기대해 볼만하다.
출판사에서 숙박업 업종추가를 위해 등록증을 발급받았다.
등록번호가 2013-000001호다.
구청직원에게 외국인 도시민박업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담당자와 함께 협업해서 문을 열었다.
부산 영도의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