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가 실화가 되어 꽂히는 도발적인 고발”
보통 빈곤한 가정이나 인물을 다룬 영화는 선뜻 볼 맘이 안 든다. 인물들의 학습된 무기력이 관객에게 번져오는 걸 막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자인은 그런 우려와 정반대로 엄청난 사랑과 분노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심지어 영화가 진행될수록 에너지는 더 커져, 종반부에 그는 마치 혁명군의 선봉장이 되어 세상을 엎어친다. 화룡정점으로 엔딩컷에서 그는 작은 미소를 던지며 자신의 삶을 관객의 뇌리에 박아버린다.
가버나움은 사실적인 레바논의 현실을 알리는 영화 치고는 매우 드라마틱하고 아름답게 잘 짜여있다. 감정이 흔들릴 땐 과감한 핸드헬드 사용, 처절하게 무너질 땐 빈곤의 거대한 미로를 보여주는 부감 샷, 슬픔에 가득 찬 자인과 배고픈 요나스의 클로즈업까지 여러 방식으로 감정을 흔든다. 그리고 인물들의 옷 하나하나의 색감과 정교한 구도들로 시각적으로 아름답다. 스토리와 대사도 비현실적이지만 강렬한 자극을 준다. 그래서 영화는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다, 아니 매력적이다. 이런 적극적인 연출 개입은 사실주의의 방관자적 태도보단 적극적인 개입으로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겠다는 의지이다. 영화를 철저히 정치 사회 도구로 잘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런 경향이 극대화되는 건 법정 씬과 자인이 생방송을 통해 부모와 세상을 고소하는 순간이다. 사실 수감 중인 죄수가 TV프로에 생방송에 전화로 참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며, 출생신고도 안된 죄수가 태어나게 한 죄로 부모를 고소하는 재판이 진지하게 진행되는 것도 말도 안 된다. 생각해보면 자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매우 허구적이다. 10명에 육박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도 자인이며, 위기에 처한 가족을 구하려 동분서주하는 것도 자인이다. 심지어 가족이 아님에도 더 힘든 처지의 이웃을 가족처럼 돌보는 것도 자인이며, 매정한 성인들에게 맞서는 유일한 사람도 자인이다. 또한 가족의 희생에 분노해 광기로 악을 처단하고, 나아가 세상을 갈아엎고 싶어 하는 도발적인 고발을 토해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작게나마 변화된 세상 앞에 작은 미소를 던진다. 이런 비현실적이지만 슈퍼맨 같은 자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영화에서나마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가버나움은 현실 고발의 영화 같지만 철저한 허구적 상상력의 힘으로 이끌어지는 영화다. 그런데도 영화의 울림이 큰 건, 단순한 빈곤 포르노라고 할 수 없는 건 실제 난민을 배우로 캐스팅한 영악하고 완벽한 선택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 자막으로 배우들의 실체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이 충격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허구를 인물의 실존으로 대체해 세상을 도발해냈고, 작게는 동참한 배우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제작사를 통하 재단도 세워져 단계적인 변화의 기틀도 마련됐다.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은 오히려 감독에겐 칭찬일지도 모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