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족쇄의 절망 방정식과 찝찝한 나 홀로 해방에 대한 체험”
전혀 경험하지 못한 노예제도 아래의 흑인의 삶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면 어느 정도로 간접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연출했다고 느꼈다. 보통은 인물이 성장하고 하나씩 극복해가면서 희망을 찾아가겠지만, 이 영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기지로 극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강했다.
사실 솔로몬이 본인의 능력을 가장 발휘했고 관객들에 가장 응원했던 순간은 바로 초반에 나온다. 뗏목을 노예들의 육상운송에서 수상운송으로 바꿔 주인인 포드의 신임을 얻고 심지어 선물로 바이올린도 받는다. 그러나 빠른 성공만큼 빠른 좌절로 관객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 이후의 시도들은 불안 불안하게 시도했고 어김없이 실패한다. 물리적으로 도망가려다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이 가축 잡듯 처형되는 걸 목격하고, 처음 보는 백인에게 돈으로 매수하려던 건 하루 만에 들통나고 만다.
그래서 솔로몬이 다른 노동자들과 노동요를 부르는 장면은 단순히 노예의 힘든 상황의 표현 같은 게 아니라 희망이 없어진 그 절망을 보여주는 단계이다. 뭘 해도 안되고, 뭘 하기도 무서워진, 그래서 이제 도망이나 복수를 제거하는 단계. 초반에 호기롭게 자신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다 외쳤건만, 이제 생존 모드로 들어가 버리는 그런 좌절.
한 단계 더 나아가 여성 흑인들은 일하는 자산에 덧대어 성노리개 취급까지 당하다 보니 좌절과 절망을 넘어 고통과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급기야 부탁이 있다고 찾아온 팻시는 자기를 죽여달라 한다. 여전히 포기와 절망 사이를 오가는 솔로몬은 중간에서 반항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임을 깨닫는다.
그러던 솔로몬에게 희망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고 너무 쉽게 해결된다. 마치 예전 연극에서의 신의 등장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그 감정에 이어 약간의 허무함과 떠나는 솔로몬을 바라보는 다른 노예들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 든다. 구조적이지 못하고 우연한 기회에 대단한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탈출이기에, 그 찝찝함은 떨쳐지지 않는다. 심지어 솔로몬이 떠난 분노를 다른 노예들에게 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물론 영화는 솔로몬의 시점에서 가족과의 상봉으로 12년의 해후를 풀며 끝나지만,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은 해방하지 않은 채로 끝났다. 이건 어쩌면 여전히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은 현시대의 흑인 차별로 그 사유를 확대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