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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Dec 30. 2021

5학년 생일파티 이후로 나는 파티를 안하기로 했다.

12살 봄 5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처음으로 이사를 했다. 집이 커지는 이사였고 누나, 할머니, 나 셋이 쓰던 방을 누나가 독립해 할머니와 둘이 써도 되었기 때문에 행복한 이사였다. 이사한 곳은 겨우 차타고 15분이 채 안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나에게 이사의 의미는 이민과 같았다. 초등학교의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까지 걸어가는 모든 가게와 도로, 외웠던 방향들, 나무와 흙조차 새 나라의 것이었다. 그 짧은 거리조차 길을 헤매기도 하고, 어디에 무엇을 파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누구에게 물어봐야할지도 몰랐다. 이사 전에는 누나와 3년을 같이 등하교를 하며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새 누나는 중학교로 떠나고 말았다.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초등학교는 두려움이었다.


4학년까지 다니던 학교에서 나는 한 반에 10명씩 존재하던 학급위원을 했었다. 장난도 많이 쳤고, 여자 아이들과도 곧잘 어울리면 놀리고 도망가고 신났던 학교였다. 한 학년에 12개인가 13개 반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학년 아이들이 서로를 알지 못했다. 40명이 넘었던 것 같은데, 반이 바뀌면 1/3 이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다시 리셋이었다. 그런데 전학 온 학교는 반이 5개였다. 그리고 5학년의 첫 날, 4년을 5개 반을 로테이션을 한 그들은 서로를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적응이 어려웠다. 생각보다 소심해졌고, 같은 반에서 또래 집단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쉬는 시간만 되면 같은 라인에 나란히 있는 5개 반에서 뒤섞여 또래집단이 형성됐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한 두 그룹에 끼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농담도 하고 적응해갔다. 친구들의 생일에 초대받아 친구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고 조금 더 많은 학생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존재감이 더 있고 싶었다고 해야 맞겠다. 그래서 내 생일 6월 말, 방학하기 직전에 나도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그 전 생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뭔가 계획했던 생일은 초등학교 5학년이 처음이었다. 할머니와 엄마에게도 계획을 말했고 그들은 기뻐했다. 나는 원체 필요한 거 없는 아이(https://brunch.co.kr/@pirings/67)였으니까.


20명 정도는 불렀던 것 같다. 할머니는 할 줄 아는 음식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샀다. 시키기도 했다. 미리 김밥을 싸두기도 했다.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점심 시간에 아이들이 다 왔으니까. 아이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컴퓨터를 하기도 하고, 레고를 가지고 놀기도 하며 시끄럽게 집을 가득 채웠고, 전학생인 나는 이번 학기는 잘 보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음식들이 하나씩 오기 시작했고, 동사무소에서 일하던 엄마도 왔다. 아이들이 인사를 하기 바쁘게 엄마는 배달 온 음식을 접시에 나르기 시작했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도 꺼냈고, 바쁘게 움직였다. 할머니도 계셨지만 할머니는 스스로가 부끄러우셨는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엄마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생일 노래도 불렀고, 케익도 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때의 사진은 없다. 왜냐면 엄마는 생일 케익을 마치고 다시 일하러 갔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다시 일하러 갈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아니 사실 생일 잔치에 친구들이 와서 즐거울지 말고는 아무 생각도 못한 게 맞았겠지. 그런데 엄마는 불편한 정장을 입고 음식을 나른 뒤에, 다시 정장을 입고 일을 하러 갔다. 남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일을 하다가 온 것이었겠지. 엄마가 예쁘다고 해주는 친구도 있었고, 멋있다고 해준 친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몇몇 아이들은 야구를 하러 나갔다. 남은 아이들끼리 놀고 있기를 한참 지나니 다시 엄마가 왔다. 아까보다는 덜 바빠보였지만 이제는 치우기 바빴다.


나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친구들이 많이 와서 시끌벅적한 기쁨도 잠시 찝찝한 마음과 슬픈 마음이 들었다. 경황없이 서두르던 엄마의 모습과 함께 아빠는 어딨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아빠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다. 여성이라는 거대감론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엄마가 나의 무리한 생일파티 때문에 일을 하는 도중에 와서 생일도 챙기고, 일도 챙기고, 다시 또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어쨌든 엄마에게 지어진 의무나 책임, 혹은 맡겨진 사랑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생일파티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학교생활은 크게 문제가 없었을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그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생일파티 이후로 나는 파티를 안하기로 했을 뿐이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없어진 10대 후반 그 어느 때 생일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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