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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Apr 29. 2020

04 그래도 새 학기는 시작되었다

남의 통증도 모르고 : 섬유근육통 환자의 직장 버티기

  모든 병원에서 버림 받은 채 새 학기가 다가왔다. 나는 이런 통증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아 학교를 쉬고 싶었으나, 당시에 만났던 모든 의사들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통증을 조절할 것을 권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통증을 조절하라. 그 문장을 그 이후로도 질리도록 듣게 된 것을 보니 아마 그것이 만성 통증에 관한 교과서적 지침인 듯했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도 진단서를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정말 새 학기가 목전이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B대 대학병원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내가 향한 곳은 H 병원이었다. 모두가 나의 손을 놔버린 그때, 정말 당시 내일모레가 개학이었기에 그대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 원장님에게 갔다. 많은 대화를 나눴고 주로 그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는 통증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잘 들어봐야 한다고 했지만 난 이렇게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통증 놈과 비폭력 대화를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꾸라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 그걸 꼭 이런 식으로 말해야 했을까요?     


긴 대화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서도 대화를 복기하며 일기를 여덟 쪽이나 썼지만 딱히 그놈을 이해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인식의 전환. 인생을 살아가는 패러다임의 변화. 근데 왜 지금. 왜. 이런 단어들을 수없이 적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얼마나 바꿔야 하기에 이렇게 엄청난 경고 신호를 온몸에 보내는 것일까. 커다란 물음표를 안은 채 3월이 시작되었다.      




  2월의 업무분장 조정 시기에 나는 거의 2~3일 간격으로 대학병원에 다니며 각종 검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나의 업무를 정할 때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일단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해야 하는 담임은 당연히 할 수가 없었고, 비담임 중에서도 업무량이 굉장히 적은 보직을 만들어 주셨다. 사실 그것이 말 그대로 ‘만들어’ 낸 자리라, 1층 본 교무실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었고, 나는 C동 5층에 있는 다른 부서의 비어있는 자리를 배정받게 되었다. 나를 포함 모두 다섯 명이었고, 연결 고리가 전혀 없기에 조금 외로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사교적 대화를 많이 해야 하는 곳이었다면, 나는 내 통증과 상관없이 자주 웃고 이야기해야 해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겐 꼭 필요한 업무 이외의 것을 모두 최소화하여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사교적인 대화나 여타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거의 들이지 않으며 수업과 아이들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론 그 외딴곳에서의 외로움이 내가 그 해 학교생활을 버텨나가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사실 비담임이면서 업무가 거의 없는 보직은 교직생활에서 정년 전에나 맡을 수 있는 정말 희귀한 자리다. 그런 자리는 정말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다. 그 기회가 삼십 대 초반의 젊디 젊은 나에게 왔으니 난 통증에게 감사해야 했던 걸까. (아니, 아프지만 않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고3 담임을 스트레이트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때 나의 상황을 표로 정리해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아예 움직이지도 못 할 CRPS(복합부위 통증증후군: 통증의 끝판왕이라고 일컬어지며 바람만 스쳐도 통증이 느껴진다고 한다) 정도의 통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지금처럼 30분만 걸어도 이틀을 누울 만큼 전신 피로감이 심하지도 않았다. 양 극단의 중간쯤이었다.


그것이 마치 담임을 맡는 것과 휴직 상태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에서 담임을 맡게 되면 일주일에 2번 정도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해야 하며, 보충수업 지도도 해야 하고, 또한 가장 힘든 담임으로서의 생활지도 업무가 추가되므로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최대치로 받게 된다. 휴직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버리는 상태이다. 휴직은 하지 않았는데 담임도 아니고 업무도 거의 없는 나의 상황이 담임과 휴직 딱 그 중간 어디쯤으로 느껴졌다.      


그럼 통증이 말하고 싶은 게 이거였을까? 중간만 해라. 이런 걸까.

하지만 학교에서 이런 자리는, 정말 내가 정년퇴임을 앞둔 60대 교사가 아니고서야 맡을 수 없는 보직일 것이다. 이런 중간쯤의 자리는 학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통증은 대체 뭘 알고 이런 신호를 나에게 보낸 것일까.     


생각해보니 내가 All or Nothing의 인생을 살아오긴 했다. 자세히 보면 분명 게으른데 하고 싶어 하는 일에서는 굉장히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운동도, 식단 조절도 과하게 열심히 했다. 학교 일에도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것이 어려워 감정 소모가 많았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음악을 하면서도 목표가 높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도 잘 안 풀리면 ‘다 때려치워’ 상태가 되어 굉장히 우울해 지거나, 좌절하고 주저앉곤 했다. Nothing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굉장히 항진되었다가 굉장히 가라앉는, 그런 를 타며 살아온 평생이었다.    

  

너 잠깐 내려 봐.

그거 아니야.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통증 놈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면,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나는 ‘우리 좋게 대화로 해결하자’라고 말하고 싶다. 놈은 너무 과격했다.          




  3월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일단 담임을 하지 않은 채 수업만 하는 기쁨을 알아버렸고, 그 해에 만난 학생들이 나와 굉장히 잘 맞았다. 이전 해와 달리 한 학년만 가르치게 되어 수업 준비의 부담도 많이 줄었다. 교무실에선 아무 말도 없이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다가, 교실에만 가면 방언이 터진 듯 수다쟁이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이야기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배우는 단어가 나오는 팝송도 들려주고, 그 가수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 가수의 전 여자 친구의 이야기도 했다가, 언제 내한한다더라, 선생님 저 그거 가요, 이런 얘기들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가르치는 것도 새로운 수업방식을 시도해보는 것도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나의 주요 통증 부위가 하필 오른쪽 목과 어깨라 판서를 하는 것이 힘들었고, 교실의 TV가 또 하필 오른쪽에 있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릴 때마다 통증이 심해졌지만 그래도 버텼다. 50분 수업을 마치면 웃으며 인사를 했지만 아이들이 없는 길목에 접어들면 에너지가 없어서 난간을 잡고 한 칸씩 힘겹게 계단을 오르곤 했다. 아프기 전에도 기립성 저혈압이 있었는데, 아픈 이후 더 심해져 3층에서 5층까지 계단을 오르면 머리가 아찔해서 중간중간 잠시 멈춰야만 했다.  

    

그렇게 수업에서 돌아오면 나는 잠깐 어떤 한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내려온 것 같았다. 관객이 많았고, 많이 웃어준, 그래서 나도 많이 웃고, 이야기를 많이 했던 그런 연극. 교무실에 돌아오는 순간 나는 무대에서 내려온 연극배우처럼 온몸에 에너지가 빠진 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대로 고개를 책상에 기대어 잠시 엎드리거나, 찜질팩을 돌려 목과 어깨 위에 얹기도 했다. 수업은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었다. 그 사실을 지난 10년간 몰랐던 바가 아니었지만 아프고 나니 그 간극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체감했다. 게다가 아픈 몸으로 하는 수업이라니, 에너지 소모가 평소보다 훨씬 컸다.



  3월엔 앞으로 1년간 어떤 동아리를 담당해야 할지 정해야 한다. 작년에 하던 것을 이어서 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찬호가 왔다. 밴드부를 맡아달라는 것이다. 밴드부는 내가 이 학교에 처음 왔던 2016년에 맡았다가, 2017년 1학기에 휴직을 하며 다른 선생님이 맡게 되었던 나의 첫사랑 같은 동아리이다. 밴드부라니! 밴드부라면 언제든 돌아가고 싶었다. 이전 해에 하셨던 선생님이 계속하시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분께 여쭤보니 밴드부는 내 담당이지 않냐며 나에게 하라셨다. 다시 밴드부를 맡게 되었다.      


직접 만들었던 포스터

학교에서 내가 가장 큰 애착을 가진 곳은 다름 아닌 밴드부실이었다. 2016년에 밴드부를 맡았을 때 내가 직접 골라 세팅해놓은 악기들, 나갈 때 장비 전원을 끄라는 벽에 붙은 메모까지 그대로라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종일 외로워도 점심시간에 잠시 들러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가끔 시간이 빌 때 혼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3월엔 오디션 때문에 좀 더 자주 가기도 했고, 다시 밴드부에 돌아간 것이 신이 나서 혼자 기타도 자주치곤 했는데 그러면 안 됐었다. 기타는 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3월 말이 되자 다시 2월 중 가장 아팠을 때쯤의 통증이 돌아왔다. 4월 11일에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예전의 통증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다.’라고 일기에 썼다.     


2018년 4월의 일기장


다시 최악의 통증감이 올라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 첫 약물 과다복용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나에겐 오히려 별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것이 하루 정도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몸의 리셋 버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18년 4월 둘째 주 금요일, 또 57개의 약을 한 번에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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